가만히 거실에서 TV 시청을 하던 세아는 힐끔 옆자리의 강세현 씨에게 시선을 줬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연습을 하고 있을 시간이건만, 오늘따라 나른한 표정으로 TV 시청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세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옮겨졌다.' 한국에 와서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던 그다. 최근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고는 해도 중간에 또 쉬어 버리면 혹시 그동안 연습해왔던 모든 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하루라도 말이다. 한 번도 쉬지 않다가 하루 쉬는 것과 좀 쉬었다가 다시 연습을 시작했는데 다시 쉬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은 안 하냐고 묻기도 좀 그렇다. 연습을 하러 가게 된다면 옆집으로 가야 하니까.' 저 손으로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거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이들도 많지만,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연주자는 역시 곁에 있는 강세현 씨다.' 그의 연주를 떠올리자 괜히 연습하러 갈 때 따라가고 싶다. 따라간다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까.' 저번에는 강세현 씨가 먼저 오라고 했기에 좋다고 따라갔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연습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도 한 번 물어보는 게 좋을까.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세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 오늘 피아…….”'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TV를 보고 있던 그였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뱉으며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 세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침에는 가끔 봤었지만, 낮잠을 자는 건 처음 본다. 신기한 마음 반, 설렘 반으로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나 깨진 않을까 했는데, 전혀 미동도 없다. 조금 더 거리를 좁힌 세아는 슬쩍 손을 뻗어 손을 잡았다. 혹시나 잠에서 깨진 않을까 조심스레 자기 쪽으로 손을 끌어당긴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지압하기 시작했다.' 자는 동안 이렇게 손을 풀어 주면 강세현 씨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를 떠올린 세아는 지압하는 데 집중했다.' 매번 학교 시험을 보기 전날 밤에 이렇게 손을 꾹꾹 눌러 주시며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말을 해주시던 부모님이셨다. 애정 어린 손길에 손이 풀린 것인지, 아니면 그 말에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지 시험을 그럭저럭 치렀었다. 시험만 치르면 항상 긴장을 하는 통에 연습 때의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주문을 들으며 만져 주던 따뜻한 손길에 더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특히 대학교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는 연습 때보다 훨씬 좋은 연주로 교수님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시험이 있던 날을 떠올린 세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무리다. 그날의 기억을 완전히 떠올리는 건. 울적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강세현 씨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옆에 이렇게 함께 있어 줘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극복했다고 생각해도 한 번 기억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자책을 하며 혼자 방에 콕 박혀 있기 다반사였다. 이렇게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어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이겨내야겠다는 마음이 커진다. 이게 모두 강세현 씨가 함께 있어 줘서 그런 것 같다.' “……오래 보면 닳아.”' “아! 안 주무셨어요?”' “잤지. 근데 누가 따갑게 쳐다봐서 깼어.”' 별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냐는 말을 덧붙이며 살짝 눈을 뜬다. 졸린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는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평온해 보인다. 평소 모습도 좋지만, 가끔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심장이 더욱 요란하게 뛴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절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지압하던 한 손을 들어 볼을 감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피곤하세요?”' “피곤은 무슨. 그냥 나른해서 그렇지.”' “제가 베개랑 이불 가지고 올게요. 조금 주무세요.”' “뭘 가지고 오려고 그래, 이 날씨에. 이불 필요 없고, 베개는 이걸로 하지 뭐.”' 갑자기 자신 쪽으로 몸을 눕힌다. 허벅지를 베고 누운 행동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세아의 몸이 온통 붉게 달아올랐다.' “아, 좋다.”' “…….”'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은 채 손을 내민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어지는 말에 수줍게 손을 맞잡았다.' “손 계속 주물러 줘. 기분 좋더라.”' 기분이 좋다는 말에 자신의 기분 역시 덩달아 좋아진다. 조심스럽게 다시 손 마사지를 시작한 세아는 눈을 감고 있는 강세현 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눈을 뜨고 있을 땐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부끄러워 이렇게 자세히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껏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시원했는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 걸 내려다보던 그녀는 시원하다는 말에 더욱 열심히 지압하기 시작했다.' “……벽세아.”' “네.”' “세아야.”' “네.”' 성을 붙여 불러 줄 때도 좋지만, 성을 빼고 세아야, 하고 불러 줄 때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모르겠다. 볼을 붉히며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눈을 뜨곤 시선을 마주해 온다.' “그냥 불러 봤어. 흠, 가끔 이렇게 누워서 올려다봐도 좋네.”' 베개보다 더 푹신푹신해서 자주 애용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다. 볼을 붉히며 따라 웃던 세아는 지압을 하던 손을 맞잡아오는 손길에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아, 연습하긴 해야 하는데 푹신푹신해서 한숨 자고 싶다.”' “주무세요. 제가 깨워 드릴게요.”'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을 어떻게 깨워야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 “오래 자진 않을 거니까 꼭 깨워 주고.”'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얼른 대답하라는 턱짓에 세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 그가 살짝 눈을 뜨더니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춰온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입 맞추는 그를 내려다보던 세아는 이내 손을 꼭 잡으며 눈을 감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정말 심장이 녹아내렸을 거다.'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은 강세현 씨가 이내 잠이 들었는지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는지 너무도 금방 잠이 든 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곤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세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매일 생각하는 거지만 이렇게 곁에 강세현 씨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곁에 있는 것이 아닌, 깊은 관계로 말이다. 입술 위에 살짝 손가락을 댄 그녀는 며칠 전부터 자꾸만 침대로 가자며 손을 뻗어오던 강세현 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틈이 날 때마다 자꾸만 은근한 스킨십을 하며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다. ' 부끄러움에 눈을 또르르 굴리던 그녀는 시선이 부엌 쪽에 닿자 화르륵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직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그날 있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유하가 말했던 기분 좋은 느낌이 그때 자신이 느꼈던 게 아닐까 싶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는 그 감각을 이겨내지 못해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렸고 말이다. ' 멍하니 기억을 더듬던 세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강세현 씨에게 시선을 줬다. 그때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괜히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망설이던 세아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그의 입술 위에 댔다. 첫날밤을 보내고 난 뒤엔 강세현 씨가 일어나버렸지만, 지금은 곤히 자고 있으니 들키지 않을 거다. 자신의 행동에 괜히 부끄러워진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