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아는 눈을 깜박이며 손에 들린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 봐도 보낸 사람이 변하는 것도, 내용이 변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편지에 시선을 주던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기쁨이 번지기 시작했다. 10년이다. 자그마치 10년 만에 처음 도착한 답장인 거다. 그것도 인쇄한 것이 아닌, 친필 편지가 말이다!' 편지를 품에 안은 그녀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 생각지도 못한 답장이었다. 10년 동안 편지를 쓰면서 답장이 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지가 도착하니 정말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한국에 들어오든지 말든지 지금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자신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 한참 행복에 겨워 침대 위를 뒹굴던 그녀는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침대 위를 뒹구느라 꼬깃꼬깃해진 편지를 들어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리던 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으로 들어온단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피아니스트 강세현이!' “야호!”' 눈만 끔벅이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10년 전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지 않던 그다. 한국에 들어온다는 말은 다시 말해 한국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정말 얼마나 기다리던 연주회인지 모르겠다. 얼핏 뉴스에 나온 모습이나 잡지의 인터뷰, 신문 속에서나 접할 수 있던 그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거다. 물론, 그의 연주 역시 들을 수 있고 말이다!' 어린애가 된 것처럼 방방 뛰며 방 안을 돌아다니던 세아는 정신을 차리곤 급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유명한 사람이니만큼 지금쯤 그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가 떴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강세현과 관련된 티켓팅만큼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질 수 없다.' 컴퓨터 부팅이 되는 동안 구겨진 편지지를 곧게 펴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양손 위로 턱을 괴곤 편지를 바라봤다.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던 그녀는 갑자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 때문에 이 좋은 기분이 방해를 받은 것 같다. 조금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으며 시간을 확인한 세아는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지금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뜬 강세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세아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 컴퓨터와 편지에 잠시 시선을 준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절대 휘둘리지 않을 거다. '''*   *   *   *   *   *   *''' 오늘은 오래간만에 협주 CD를 꺼냈어요.'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울컥, 하는 거 있죠? ' 이렇게 좋은 소리를 한국에서는 라이브로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워요. ㅠㅠ' 아무리 좋은 소리라고 해도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건 역시 강세현 씨의 연주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역시 세계 최고!' 참, 이거 아세요?' 돌아오는 7월 16일이 제가 연주를 처음 들은 날이라는 거! ^ ^' 올해는 계신 곳 날씨가 굉장히 더울 거래요.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세요.' '' 세현은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접어 봉투에 담았다. 10년 동안 꾸준히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팬이다. 열다섯부터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으니 이젠 스물다섯일 거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편지 내용은 한없이 어리기만 하다.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이 뒤에 산 두 개는 또 뭐야.”' 저기 보이는 ‘ㅠㅠ’가 우는 표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매번 편지를 보낼 때 저런 그림을 그렸으니 눈치로라도 알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그려진 저 그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지 알 길이 없다. 표정 같긴 한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선생님,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편지에 적힌 주소가 맞는다면, 바로 코앞에 보이는 집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꼬맹이가 사는 집일 것이다. 차에서 내린 그는 집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한적한 것이 꽤나 마음에 든다. 꼬맹이가 산다는 집 바로 옆집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던 세현은 옆집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편지에 혼자 살고 있다고 했으니 집에서 나오는 건 분명 벽세아라는 이름을 가진 꼬맹이일 거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옆집으로 시선을 주던 세현은 씩씩대며 밖으로 나오는 중년 여성에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그 녀석이라고 생각했건만, 나오는 건 다른 사람이다. 그것도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제법 성질이 있는 사람 말이다. 쿵쾅거리며 나온 여자가 울타리 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으며 짧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 세현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화풀이하는 거라면 다른 곳도 많은데, 왜 벽세아 집에 화풀이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쓰더니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가만히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현은 혀를 찼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저럴 정도면 아는 사람에겐 오죽할까 싶다. 게다가 조금 전 봤던 인상 쓰는 모습만 봐도 기가 찬다. 시야에서 중년 여성이 사라지자, 그의 시선이 다시 옆집으로 향했다. 벽세아의 집에서 저런 여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 “설마 가족은 아니겠지.”' 저런 사람과 상종하는 건 별로 보기 좋지 않다. 혀를 차던 그는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틀었다. 어느새 기사가 짐을 현관 앞까지 가져다 놓은 상황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사까지 자리를 뜨자 이젠 자신밖에 없는 상황이다. 휴가 동안 자신이 살 집을 천천히 훑어보던 세현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뿌듯하기도 하면서도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화가 나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건 순전히 자신의 변덕 때문이었다. 다만 그 변덕의 끝이 이곳이라 이런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자신이 쉴 집 바로 옆에 10년 동안 자신만을 바라보던 녀석이 살고 있는 거다. 점차 기대감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낀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집들도 많건만, 계속해서 옆집을 구하기 위해 집주인과 접촉을 했던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집을 팔지 않겠다고 하기에 웃돈까지 얹어가며 극구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거다. 단지 옆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 왜 그렇게 꼬맹이의 옆집에 집착했던 것일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뭐가 되었건 간에 이제 와 생각해 봤자 이미 자신은 옆집으로 이사를 온 상황이다. 이제 와 돌이키기엔 휴가 받은 시간이 아깝다. 힐끔 옆집에 시선을 주던 그는 집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