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날의 진실 (1)

아침이 되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채연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제저녁에 딱 한 잔만 마시려던 와인을 연거푸 들이켰던 게 기억이 났다. 그러다 한 병을 끝까지 비웠었는데…… 그다음에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별일 없었겠지.

어제 너무 마셨었는지 속이 쓰리면서 갈증이 밀려왔다.

채연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 비실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때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는 쿠트야의 모습이 보였다. 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감고 있는 남자.

저 남자가 왜……? 그 순간 어딘지 모르게 허해지는 몸의 감각이 느껴졌다.

무심코 시선을 내렸을 때는 엄청 야시시한 분홍색의 슬립이 그녀 몸에 걸쳐 있었다. 한쪽 어깨는 내려가 있었고 치마 기장은 허벅다리 중간밖에 오지 않는 길이였다.

“아아아아아악!”

발악 같은 그녀의 괴성에 쿠트야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쿠트야가 반사적으로 채연에게 달려오자 그녀는 베개를 들어서 그대로 날려 버렸다.

베개는 정확하게 날아가 그의 면상을 갈기고 떨어졌다.

“아아아, 정말 당신은 인간도 아냐!”

“뭐?”

“당신을 저주할 거야. 영원히!”

채연이 앙칼지게 노려보자 쿠트야가 달려와서 그녀의 양 손목을 움켜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요!”

손목을 빼내려고 하면서 몸부림치자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이 내려갔다.

쿠트야의 눈에도 어깨가 드러나는 분홍색의 드레스가 보였다. 실크 원단의 민소매 드레스였다.

화들짝 놀란 눈을 하며 그가 이불을 걷어내자 채연이 몸을 웅크리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뭐예욧!”

“이 옷 뭐지?”

보고도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어제저녁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로 자고 있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왜 남의 옷을 제멋대로 갈아입혀요. 왜왜 그랬어요?”

격하게 흥분된 채연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안 그랬다.”

“나가. 나가라구요!”

집어삼킬 듯이 이를 갈아 마시는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지만 쿠트야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젯밤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나밖에 없어. 마지막으로 본 것도 나고.”

침입자가 없었음을 그는 정확하게 확신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사들하고 똑같이 훈련을 받았고 때로는 더한 훈련도 받아왔다. 수많은 황후들이 보내는 적대감을 모르지 않았기에 언제나 침입자에 대비한 몸은 작은 기척에도 반응할 수 있었다. 어젯밤 이곳에 들어온 자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쿠트야의 음성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채연은 머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의 얼굴을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눈동자도 그녀를 향했다.

“원래 이런 옷이 있었던가?”

그녀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이제야…… 기억이 나고 말았다. 엘리장드가 드레스를 가져다주면서 했던 말이.

드레스에 사랑의 마법을 걸어놨다고 했었다.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면 드레스가 변한다고도 했었다.

[무조건 변하지는 않고요. 미세한 피부 접촉이 있어야지만 드레스가 운명의 상대를 판단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누군가와 스킨십이 있었다는 건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쿠트야를 또다시 적대적으로 응시했다.

“폐하께서는 왜 방 놔두고 응접실 소파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거예요?”

“마치 취조를 당하는 것 같구나.”

“말씀해 주시죠.”

“상 받으러 왔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술에 취해 뻗어 있더구나.”

쿠트야의 눈의 살짝 치켜 떠졌다. 기억의 마지막 장이 실종된 채연에게는 뜨끔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퍼마신 거지? 그녀의 눈알이 또르르 굴러가면서 주위를 훑었다.

식탁 위에는 빈 병 하나와 반쯤 비워진 병만이 일부러 놔둔 것처럼 보기 좋은 구도로 놓여있었다.

식탁 위가 말끔히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주 병은 그대로잖아…… 내가 두 번째 병도 땄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채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장 벽 무늬를 향했다.

“물론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그 상태로 놔두고 가는 게 영 불안해서 말이야. 요나와 데일은 손님들과 있어야 하니 불러올 수도 없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남아 있었던 거다.”

할 말을 마친 쿠트야는 개운한 표정이었다. 비로소 혐의를 벗었다는.

이제 쿠트야의 차례였다. 그가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으며 채연의 눈을 강하게 부딪쳐왔다.

“어제저녁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니요?”

쿠트야의 눈이 집요하게 채연에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갈무리했다.

“내가 오기 전에 누구와 있었던 거냐고?”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채연의 목청이 갑자기 높아졌다. 그녀도 자신의 소리에 놀랐던 터라 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감쌌다.

‘드레스가 변했다면 분명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지 몸이 닿았다는 건데.’

그녀는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