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가 성큼 성큼 걸어와 한주의 어깨를 잡고 돌려 세웠다.'“강한주.”'억센 손길과는 다르게 한주의 이름을 부르는 준우의 목소리는 애절하기 그지없다. 한주는 고개를 돌려 준우의 시선을 피했다. 준우가 한주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자기의 눈과 마주치게 돌렸다.'“나 좀 봐.”'그렇게……그렇게 말하지 마. 상처받은 아이처럼……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 부르지 마. 한주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우리 이러지 말고 얘기 좀 하자. 나한테 잘못이 많은 거 알아. 고칠 기회를 줘야지. 내가……다 할게. 당신이 원하는 게 뭐든지 간에 다 맞출게, 노력할게. 나, 다 버릴 수 있어. 일이건 뭐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다 버릴게. 나한테 기회를 줘.”'“……내가 그걸 바란다고 생각해?”'“그럼? 그럼 뭔데?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 상황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상황을 바꾸겠다고. 당신이 이런 마음을 먹게 만든 이유를 없애겠다고.”'한주는 괴로운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준우야.”'“말해, 뭐든지.”'“난 더 이상 마음이 힘들고 싶지 않아.”'“그래.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거 알아. 더 이상 힘들지 않게 할게.”'“……이런다고 바뀌는 거 없어.”'“강한주!”'준우가 이를 악물며 한주의 이름을 불렀다.'“이러지 마. 나를 어디까지 몰려고 그래. 정말 내가 미치기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준우의 눈이 터질 듯이 충혈 되어 있었다. 알았다고, 다 없던 걸로 하자고,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준우를 안아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한주는 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여자랑 헤어졌다고 미쳐? 니 인생이 그렇게 단순해? 너야말로 나를 몰지 마. 내가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제발 이해 좀 해줘. 나를……몰라? 내가 순간적인 감정으로 이런 결정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가 이래서 돌릴 것 같았으면……안 했어.”'준우의 얼굴에 절망스러움이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되는 건가.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건가.'“무섭구나, 당신.”'“응. 내가 그래. 이렇게 모진 인간이야, 내가. 그러니까 괜한 수고 하지 마. 이럴 시간에 니 마음이나 다잡아. 사생활 때문에 일까지 망치지 말고 정신 차리란 말이야.”'준우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나는……절대 당신 못 보내. 못 놔줘. 지금 당신이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기다릴게. 절대……끝 같은 거 못 내. 지금은 당신 마음이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거야. 내가 기다릴게.”'“너,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야?”'“…….”'“난……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야. 내가 뭔가를 결정해서 입 밖으로 내는 건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야. 내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마.”'“……우리 시간을 좀 갖자. 좀 지나고……다시 얘기해.”'“이준우.”'돌아서는 준우를 한주가 불러 세웠다.'“다시 오지 마.”'“……올 거야.”'“니가 이러면……나 여기서 못 살아.”'“무슨 소리야?”'“니가 이러면……나 한국 뜰 거야.”'한주를 보는 준우의 눈빛이 황망했다.'“그게 무슨 소리야?”'“집도 팔고, 직장도 그만 두고……외국 어디로 가서 숨어 버릴 거야. 나 그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니가 계속 이런 식이면 난 아예 어디로 없어져 버릴 거라고.”'준우가 하, 헛웃음을 웃었다.'“니가 나한테……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면. 내가 가고 싶다고 할 때, 보내 달라고 할 때, 잘 보내주는 걸로 니 마음을 보여줘. 그게 니가 나한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거야.”'한주는 못에 망치를 치는 심정으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준우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어둠 속에 준우를 놔 둔 채 한주는 돌아서서 아파트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준우의 손이 팔을 잡을 것 같다. 등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을 것 같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떠나. 이렇게 말하면서 안아 주면 맞아, 그래, 니가 맞아, 라고 대답하고 그 품에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한주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집 안으로 들어선 한주는 불도 켜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어둠 속에 아직도 준우가 그대로 서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준우의 굽은 어깨가 누가 툭 치면 그대로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계속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한주는 창을 떠났다.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고 한주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준우가 욕이라도 몇 마디하고 자리를 떠났으면 좋겠다. 더럽게 재수 없다고, 뭐 저런 게 다 있느냐고, 오만 정 다 떼고 저 자리를 떠나 그냥 나를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