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오늘은 박 회장님 댁 가족이 세빈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날이다.'밖에서 먹으면 편리하고 분위기도 좋고 맛있을 텐데, 세빈의 할아버지 윤 회장은 왜 굳이 집에서 밥을 먹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박 회장님 댁이나 아니면 세빈의 집에서 꼭 양쪽 집안 식구가 모두 모여 식사를 한다. 고작 밥 한 끼 먹는 일인데 무슨 대단한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며칠 전부터 집안은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으로 난리가 아니다. '큰오빠 세혁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민규 아저씨 이름을 부르며 계속 웃는다. 여자도 아닌데 남자랑 통화하면서 뭐가 저리 좋은지. '세빈은 민규가 싫었다. 언젠가 그가 외국에서 잠깐 한국에 왔을 때 세혁을 만나러 집으로 온 적이 있었다. 시험기간이라 세혁을 붙들고 수학을 물어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민규가 어찌나 재수 없게 굴었던지. 옆에 딱 붙어 앉아 초등학교 수학도 수학이냐는 둥, 공부할 거나 있냐는 둥 빈정대는데 정말 기분 나빠 수학책을 면상에 던져버리고 싶었었다.'게다가 세혁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세빈이 끙끙대며 풀고 있는 문제를 눈으로 쓰윽 보더니 ‘답이 1이네’라고 하는데, 그땐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기절할 뻔했다.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다 풀었을 때 그 문제의 답은 정말로 ‘1’이었다. '눈으로 수학을 푸는 기인. 똑똑한 인간은 겁이 난다. 그리고 기분 나쁘다. 사람을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그런 기질이 있다고나 할까? 하여튼 오늘은 민규와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정원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사람들이 거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빈은 엄마가 입으라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입은 거추장스러운 이 옷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다. 어른들 속에 있는 것도 따분한데, 옷까지 나풀거리는 것으로 입고 있으니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그런데 박 회장님이 앉은 자리에서 자꾸 방귀소리가 났다. 어른이 실수로 그러는 것이라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도 없고, 세빈은 고개 숙여 숨을 들이켜느라 죽을 뻔했다. '박 회장님도 방귀 소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세빈의 할아버지에게 정원으로 나가자며 밖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박 회장님이 일어난 엉덩이 자리에 베이지색의 뭔가가 납작하게 눌린 채 놓여 있었다. 눌린 것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면서 제 모양을 찾아가자 그것은 테디베어 전문점 솜씨의 진품 테디베어 인형이었다. 아니, 그럼 박 회장의 엉덩이 아래에 깔려 있는 동안 저 귀여운 테디베어에게 그 독가스가 온전히 살포된 것이 아닌가! 불쌍한 놈.'“어, 이게 여기 있었네.”'밖에서 세혁과 이야기를 나누던 민규가 거실로 들어오더니 대뜸 박 회장의 방귀를 흠뻑 먹은 테디베어 인형을 집어 올렸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그것을 세빈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너 테디베어 인형 좋아한다면서?”'세빈은 그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선물이니 받아야 하는데 박 회장님의 방귀가 생각나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혁은 얼른 받으라며 세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세빈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었다.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덥석 받아서 끌어안을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민규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선물을 주는데도 고맙단 말도 없고, 게다가 인상까지 쓰는 세빈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세빈은 하는 수 없이 민규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하지만 지저분한 생각에 도저히 안을 수가 없어 한쪽 귀를 잡아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