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무 출장 좀 가야겠어요.”'“출장이요?”'출근하자마자 난데없이 출장이라니 한희는 뚱딴지같은 문 전무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우리 계열사 중에 MK패션이 동종업계 점유율이 낮은 거 알지? 동종업계도 그렇지만 계열사 중에서도 제일 떨어지지. 그런데 이번에 큰 건이 하나 들어왔거든. 세계적인 골프 선수 정애리 씨 후원한 덕을 좀 봤는지 미국 S&A에서 우리와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그래서요?”'그거랑 자신이 출장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몰라 반문하자 무슨 멍청한 질문이냐는 타박이 돌아왔다.'“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긍정적이 부정적이 되지 않게 계약서에 도장 찍고 와야지.”'“제가요?”'“그럼 이 나이에 내가 가리? 내가 패션에 뭘 알아야지.”'“저도 패션에 그닥…….”'한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없어하자 문 전무는 한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희는 문 전무가 왜 자신을 훑어보는지 몰라 몸을 움츠러들었다.'“하기사 한 전무도 옷 입는 스타일 보면 영 꽝이야. 그러고 보면 안 가느니만 못하는 수도…….”'“전무님!”'“하하하.”'“왜 자꾸 저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세요?”'“열심히 노력한다며? 그래 가지고 나한테 주식 다 뺏기지 않겠어?”'“우이씨. 힘든 일은 저한테 다 맡기고 전무님은 맨 날 놀러 다니시니 느지막에 팔자 피셨네요.”'문 전무가 자꾸 한정식 집에서 계약했던 건을 가지고 또다시 한희를 부러 먹으려 들자 한희는 절로 목소리가 삐딱하게 나왔다. '“그래 좀 있으면 한 전무 덕분에 회춘할 것 같아. 중후하다고 아직도 따르는 아줌마들이 얼마나 많은지…….”'“글쎄요. 전 문 전무님 따라 다니는 아줌마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가 괜찮은 아줌마 소개 시켜 드려요?”'“뭐? 누구를?”'얘기가 그쪽으로 흐르자 문 전무가 순간 당황했다. 한희는 문 전무가 처음으로 당황하자 흐뭇해서 좀 더 밀어 붙였다.'“회춘하신다면서요. 미화실 뽀글이 아줌마 어떠세요? 나름 패션도 통하실 것 같고 일단 영계시잖아요.”'한희가 문 전무를 뽀글이 아줌마에 갖다 붙이자 문 전무는 경기를 일으켰다.'“어디 그런 뚱뚱한 폭탄머리를 나같이 젠틀한 신사에게 갖다 붙여?”'“뭐시라 고라? 뚱뚱한 폭탄머리?”'어디선가 나타난 뽀글이 아줌마가 빗자루를 한손에 턱하지 걸치고 콧김을 마구 내뿜고 있었다. 흡사 성난 황소마냥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처럼 전력질주하자 문 전무는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가기 바빴다. 한희는 MK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푸근해졌다.''문득문득 떠오르는 진현의 키스를 생각하지 않으려 며칠 낮밤을 회사 일에 매달리고 있는 한희는 요즘 S&A사와 관련된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스포츠웨어가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기능성과 디자인을 겸비한 제품들이 많았다. 한희는 이번엔 자신의 힘으로 꼭 성공 시키고 싶었다.'“아버지 저 내일 라스베가스 출장가요.”'“그러니? 몸조심 하고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아버지도 제가 짠 식단 꼭 챙겨 드세요. 그리고 운동도 꼭 하셔야 해요?”'“그래 알았다. 걱정하지 마.”'한희는 뒤에서 한 회장을 꼭 안아주었다.'“그동안 죄송했어요.”'“별말을 다 한다. 내가 더 미안하지.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그리고 네게 전부였던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이젠 아버지도 제게 전부에요.”'“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어쨌든 널 지키지 못 한건 다 사실 아니겠니. 하지만 지금이라도 네가 날 이해해줘서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아버지.”'아버지와 오해가 풀리면서 한희의 마음은 어느 때 보다도 행복했다. 마치 가슴에 꼭 박힌 가시가 빠져나간 듯이 후련했고 이제라도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어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힘들었을 아버지 때문이라도 다 잘해 보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도. 회사도. 한희는 그날 저녁 그동안 있었던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한희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번 출장에는 김 비서가 동행했다.'“김 비서님 아이가 엄마랑 떨어지려 하던가요?”'한희가 MK그룹 전세기 안에서 김 비서에게 관심을 갖고 물어보았다. 김 비서는 오랜만에 외국 출장길에 올라 싱글벙글 들뜬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만 비행기 탄다고 입이 댓발 나왔어요.”'“풉. 이번일 끝나면 가족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네. 그나저나 잘 되어야 할 텐데요.”'“잘 되겠죠. 잘 될 거예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 비서의 걱정에 한희도 걱정이 됐다.'“그런데 요즘 SJ에서 조용하네요. 노원지구 먹었다고 MK주식 순순히 가만있을 사람이 아닌데요. 정말 서진현 사장은 전무님 말대로 하이에나 같은 인간이에요.”'“역시 김 비서님하고 저는 통한다니까. 전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거든요.”'진현의 이야기에 한희는 괜히 죄진 사람처럼 뜨끔했지만 김 비서 말에 열심히 맞장구 쳐주었다.'“그래도 서 사장님 귀품 있는 게 귀티가 잘잘 흐르잖아요. 전 처음에 SJ그룹에서 신인 모델 발탁한 줄 알았어요. 후에 재벌2세라는 애길 듣고 뒤로 확 넘어갔잖아요.”'“왜요?”'“결혼 조금만 늦게 할 걸 후회 되서.”'“헐. 김 비서님!”'“하하하. 그런데 지금은 미련을 접었어요.”'“왜요? 대쉬해 보시지. 그 남자 연상 연하 가리질 않는 거 같던데. 완전 바람둥이잖아요.”'“서진현 사장님 눈이 아주 높다는 소문이에요. 전무님은 몇 번이나 직접 만나셨잖아요. 어때요?”'“글쎄요. 그리 눈이 높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 보면.”'한희는 진현 옆에 붙어있던 윤정이나 정희를 떠올리자 비릿하게 웃으며 콧방귀를 끼었다.'“그래요? 전무님은 어떠세요? 서진현 사장 보면서 설레지 않았나요? 가까이서 직접 보면 여자들이 아주 넋이 나간다던데. 그동안 전무님 외부일정은 정 비서님이 에스코트해서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전무님이 서 사장님하고 싸우는 것도 못보고 너무 아쉬웠어요.”'“다음번엔 서 사장이랑 싸우게 되면 꼭 김 비서님 부를게요.”'“하하하. 네. 꼭 그래주세요. 전무님은 남자친구 없으세요?”'김 비서의 질문에 진현이 떠오르자 기분이 언짢아졌다.'“에이, 있으신가보다.”'김 비서의 질문에 한희가 잠시 비행기 밖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가 있다고 오해한 김 비서가 지레짐작으로 얘기 하였다. '“아니에요.”'“그럼 이제까지 호감을 가졌던 사람도 없었단 말이에요?”'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단정 짓자 한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런 사람이야 있었죠.”'덥석 김 비서의 미끼를 문 한희는 간단히 시후 얘기를 꺼냈다.'“병원 나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한 번도 연락 못했어요. 누구 때문에.”'“그럼 뭐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연락도 못하고. 그게 무슨 남자 친구에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이죠.”'“남자친구가 아닌 그냥 호감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했잖아요..”'“뭐에요. 재미없게. 뜨거운 사랑 해보신 적 없어요?”'“김 비서님도 의대 한번 들어가 보세요. 사람을 만날 수나 있었는지. 의과 대학생이나 인턴이 연애한다면 그 사람을 저희 세계에서는 신과 동일시 시켜요. 대단한 놈이라고.”'“정말요? 푸하하하. 정말 불쌍하다. 전무님도 이참에 사겨보세요. 아…… 소개팅이라도 시켜드려야지 안되겠다. 전무님 팬 카페 2개나 생긴 거 아시죠? 하나는 제가 관리하는데 블링블링한 게 완전 인기 짱이에요. 조만간 제가 주선할 테니 부담 없이 나오셔서 정열적인 사랑을 하세요. 청춘을 불살라야죠. 한창 좋을 때인데 나이가 아깝다.”'김 비서의 연애론에 한희는 왜 서진현이 떠오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진현이 다시 와서 사귀자고 하지도 않겠지만 만약 다시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갑자기 자신한테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마음이 불편했다.'난데없이 진현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화들짝 놀란 한희는 한심하게 남자나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자료 한 번 더 살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가방에서 다시 한 번 봐야할 자료들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