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버들개지 분분하듯

과연 검은 도자기 화병에 홍매화가 꽂혀 있었다. 상주문이 쌓인 서안 구석을 차지한 홍매화 세 가지가 봐도 봐도 낯설어 문경은 그만 말하던 중인 것도 잊었다.

“얄궂군. 자네가 꽃에 그리 취미가 있던가?”

“예? 예, 아니, 예…….”

힐긋 문경을 일별한 황제가 던진 말에 문경은 퍼뜩 놀라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황제는 잠시 생각을 가늠하듯 허공에 든 붓을 꼼짝도 않다가 이내 빠른 속도로 적어 내려가며 말했다.

“그럼 가까이 와서 보아도 좋으이. 한 단 더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 아니옵니다, 여기서도 충분히…… 잘 볼 수 있지만, 감히 천자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 될 말,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오늘따라 말이 많군.”

황제의 핀잔에 문경 스스로도 멋쩍은 노릇이었으나 방금 전 마음을 바꾼 바가 있어 무릎걸음으로 한 단 더 올라갔다. 반듯하게 옷자락을 정리하며 일단 매화를 감상하는 시늉을 했지만 곧 문경의 시선은 용안으로 향했다.

흰 살갗과 또렷한 이목구비에 모후의 자색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황제는 서른 살을 두 해 남긴 지금도 즉위 초반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스물두세 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던 모친 인화태후의 피가 강하게 작용하는 게 틀림없다. 조당에서 황제가 가면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그 생김새가 한 자리 차지할 거라고 뒤에서 수군거릴 정도로 닮은 모자였다. 하나 농으로라도 그런 언급은 절대 금물. 황제는 이미 그의 생전에 태후를 거론하는 자가 어떤 대가를 치를지 신료들이 결코 잊지 못하도록 보여준 바가 있다.

“볼 거면 제대로 봐야지, 짐의 얼굴을 그리 열심히 보면 매화는 언제 보나?”

눈길 한 번 던지지 않고도 시선을 알아챈 황제의 하문에 문경은 둘러대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신색이 어떠신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사옵니다, 폐하.”

“짐의 신색을 살펴 무엇하게?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

“실은 소신이 아침에 장천궁에서 나오는 한 태의를 붙들고 닦달을 했나이다.”

“그래서?”

신하가 황제를 조석으로 진맥하는 태의를 핍박하여 황제의 신상에 관해 캐물은 일은 그 자체만으로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황제는 조금도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한 태의는 폐하께서 호랑이처럼 강건하다고 하는 것을, 소신은 어딘가 미심쩍은 것이 단 하나라도 없었느냐, 잘 생각해서 대답해야지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당신은 내 손에 죽는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며 을러댔사옵니다.”

“덕분에 한 태의가 오줌을 다 지렸다지?”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귀에 이미 다 들어간 일인 모양. 문경은 더욱 거칠 것 없이 말했다.

“죄를 주신다면 달가이 받겠사오나, 결코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사옵니다. 소신, 전장에서는 악귀라고도 불렸던 몸이지만 겁이 없는 건 어디까지나 제 일신에 국한된 일. 모시는 주인의 신상에 한 점 의혹이라도 있다면 그 의혹에 또한 악귀처럼 달려들 것이옵니다.”

황제는 엷게 웃기만 하고 비답을 쓴 상주문을 궁정에게 주고 다음 상주를 펼치며 말했다.

“언변이 는 건 그쯤하면 알겠으니 이젠 할 말을 하게. 아직도 물어뜯을 의혹이 남은 모양인데.”

“신이 이리 가까이서 뵈오니 호랑이처럼 강건하다던 태의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여겨지옵니다. 하지만 오늘도 오후의 연무를 거르실 참이라니 못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사옵니다. 간혹 미행을 나가 계실 때 말고 언제 한 번 폐하께서 그런 일을 소홀히 하신 분이셔야 말이지요. 매달 초 묘당 참배를 위해 재계하시는 날이 그나마 유일한 휴식일이지 않사옵니까.”

“그랬지. 하나 공연한 걱정할 것 없네. 몸이 미령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을 따름이야.”

“시간이, 없으시다고요.”

황제의 말을 되뇌면서 문경은 새삼 매화 화병을 쳐다보았다. 쿡, 황제가 웃었다.

“저런 걸 꺾어 올 시간은 있었느냐고 따져 물을 기세로군. 이거 원, 신하의 눈이 무서워 꽃 한 송이 마음대로 못 꺾겠어.”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 소신은 결코 따지고 들자는 것이 아니라…….”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황제가 걱정이 되는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어 문경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상주문에서 고개를 들어 시무룩한 곰 같은 시위대장을 바라본 황제는 모처럼 죽마고우의 우의를 발휘해 따스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