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지켜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이 그렇다면.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면.” 준훤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가 널 사랑하나 보다.”
<발췌 글>
“가야 하는데. 당장 가봐야 하는데.” 연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비가 된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연수에게 유독 가혹한 세상이, 거센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일렁거렸다. 현기를 느낀 연수는 흰 블라우스와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걸친 몸을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힘이 풀린 연수의 손에서 휴대폰이 털썩 떨어져 나갔다. 타닥. 짧은 파열음이 울리고, 몸의 중심을 잃은 연수를 누군가 뒤에서 붙잡았다. 연수의 팔에 크고 단단한 손이 놓였다. “괜찮아?” 댄디한 캐주얼 차림의 젊은 남자가 탁하게 쉰 저음으로 말을 뱉었다. 그의 눈길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응시하다가 낯빛이 창백한 연수에게 꽂혔다. 감긴 눈을 떠 올린 연수가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남자를 돌아다봤다. 키가 훤칠하고 거만한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 연수는 무심결에 외마디의 신음을 토했다. 현재 연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난생처음 본 남자가 해주었다. “괜찮아?”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수는 짓누르고 짓누른 감정이 봇물처럼 솟구쳤다. 꿋꿋이 버티려는 저에게 누군가 그리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연수의 눈동자가 아슬아슬 흔들렸다. 출렁이는 눈빛으로 남자를 건너다본 연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친절을 베풀어줘서 고맙다고,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상투적으로나마 응수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연수의 팔에서 손을 거둔 남자가 껄끄러운 한숨을 쉬며 상체를 수그렸다. 바닥에 놓인 휴대폰을 주워든 남자는 연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내밀었다. “받지.” 남자의 손을 쳐다본 연수는 저의 휴대폰을 건네받을 의지가 없는 양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동자에 각인시킬 듯 연수의 얼굴을 예의주시한 남자가 마지못해 한 번 더 손을 움직였다. 남자는 연수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쓰러지면 민폐 아닌가? 괜찮으면 그만 길을 비켜줬으면 좋겠군.” 선뜻 친절을 베푼 것과 달리 남자의 눈빛이 냉소적이고 오만했다. 연수에게 도움을 준 일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쩌다’인 것 같았다. 뭔가 안타까운 사정을 지닌 듯한 연수를 보며 호기심이 생길 법도 한데 남자의 눈동자는 차가운 빛으로 한없이 정적이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본디 수많은 사연의 연속이지’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통달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감정이 무딘 남자의 거만한 눈빛이 사지로 내몰린 것 같은 연수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네가 지금 넋을 놓고 있을 때냐며 따끔히 충고를 가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연수의 손에 잠깐 다녀간 남자의 체온이 따스했었다. 눈빛과 상반된 그 온기가 찰나에 깊숙이 파고든 것처럼 쉬이 가시지 않고 연수에게 남아 있었다. 연수의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을 담았다. 남자를 반히 응시한 연수는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 쥐며 옆으로 비켜섰다. “미안합니다.” “알면 됐고.” 간단히 답한 남자는 연수에게 꽂힌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고 미련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남자와 연수의 몸이 닿을 듯 말듯 스치며 서로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연수의 코끝에 은은하고 산뜻한 스킨 향이 맴돌았다. 낯선 남자가 남긴 작은 여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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