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권 화폐에 얼굴을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사임당. 그러나 현모양처이자 훌륭한 작가라 칭송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기존 남성 중심의 시선에 맞춰 평가 절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조선시대를 살면서 그녀처럼 역동적인 작품 활동을 남긴 여류 화가가 정말 현모양처이기만 했을까? 혹시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포장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감히 상상해 본다. 신사임당은 당차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여성이 아니었을까하고……. 
남편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다양한 예술적 활동을 위해 처가살이를 남편에게 제의할 수 있을 정도로 위풍당당한……. 그래서 그녀의 사랑 또한 위풍당당 했을 거라고…….

-본문 중에서-

사내의 속내를 듣고 앉아 있기가 거북했다.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막상 제 입으로 말하는 사내와 마주 앉아 있자니 불편했다. 이규라면 절대 그런 식의 너저분한 말 따위 할 리 없었을 것이라 더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인제 그만 답구를 주시지요.”
“아, 알았소. 보기보다 성정이 급한 분이시구려.”
자신을 이수라고 소개한 사내는 신세 한탄 겸 집안 자랑 질을 한 후에야 제가 던진 시구에 답을 했다.
“오지 않는 달님을 빨리 오라 다그쳐 보았으나 아직 때가 아닌 것을. 혼자 맘 졸이며 동구 밖에 나가 선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어찌 오지 않는 달님만 탓하는가? 동장군이 물러가면 아지랑이 제 몸을 흔들 테고, 해가 지고 나면 달님 또한 환히 얼굴을 내밀 것을. 급한 성정에 저 혼자 괜히 속만 태우네.”
사내의 시구가 방 안을 조용히 울리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분명 이규가 아닌데 어찌 제 속을 저리 잘 달래주는 것인지 하는 생각에 낯선 사내가 이규였으면 하고 다시 사내가 앉은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가씨!”
순간 사월이 방정맞게 문을 확 열고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신 줄을 놓고 이규가 아닌 사내를 보고 앉아있었을 것이었다.
“호들갑스럽기는……. 무슨 일이냐?”
제가 낯선 사내를 넋 놓고 보고 있었음이 부끄러워 괜히 사월을 탓했다.
“없습니다. 오시지 않았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도련님은 보이지 않…….”
사월이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의식한 듯 그제야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인선은 이규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앞에 앉은 사내에 대한 예우조차 잊고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확실한 거냐? 확실히 오지 않았더냐?”
“예. 아가씨.”
“너, 내 서신은 확실히 한성으로 보낸 것은 맞더냐?”
“그럼요. 제가 발 빠른 시월이 아비한테 노잣돈까지 얹어 주어 확실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다는 거지? 그런데도 오지 않았단……. 사월아, 날 부축해다오. 방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미리 보기]

“자, 이제 그만 진짜 속내를 말씀해 보세요. 제게 정말 관심 없으신가요?”
“……없소.”
“확실한가요?”
“뭐가 말이오?”
“제게 관심 없단 말 확실하냐고요. 그럼 제가 누구와 혼인을 하든 상관없으시겠네요. 예를 들자면 형님이신 이원 도련님이라든지…….”
일부러 이원의 이름을 거론해 봤다. 순간 일그러지는 이규의 표정에서 인선은 희망을 보았다. 인선 제게 마음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본 이규는 기대로 빛나는 인선의 눈동자를 피하며 대답했다.
“그건 인선 낭자 마음이오.”
결국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터무니없게도 인선의 가슴을 찔러댈 말이었다. 일순간 일그러지는 인선의 얼굴이 고통과 좌절, 그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았다. 아마 인선은 지난 열흘 동안 제게 말을 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일부러 차갑게 굴었을 것이었다. 그러면 제가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규는 인선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는 저 자신이 너무 못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제 방에는 왜 찾아오셨나요?”
“뭐, 뭐라고 했소? 아아, 그건 그냥……”
“제가 저고리 고름이라도 풀어 제치고 도련님께 달려들면 어쩌시려고. 어린 시절의 저를 기억한다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것 아실 텐데요.”
“……어린아이가 아니니 절대 그럴 리가 없지요. 낭자도 나도 이젠 어린 시절의 우리가 아니니까.”
인선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결국 이규에게 저는 정말 어린 시절의 동무 이상은 아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제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의 협박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규를 보며 자꾸만 모래성처럼 쌓아 올린 기대가 허물어지는 것이 느껴져서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이규 도령이 아니라고요?”
“그렇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은 어린 시절의 내 동무 인선이었을 뿐이오. 형님께서 사월의 모습으로 나를 놀린 그 처녀가 바로 인선 낭자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때 알게 되었소. 그래서 아무리 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단 것을……. 결국 어린 시절 같이 뛰놀던 동무 인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잠시 날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도…….”
“아련한 추억일 뿐이었다……?”
“그렇소. 그러니 내 형님과 혼인을 해도 난 상관없다는 말이오.”
이규의 마지막 말은 제게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는 이규를 보며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숨겨야 했다. 속으로 곪아서 고름투성이가 되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를 받았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이제 알았으니 그만 나가 주세요. 쉬고 싶네요. 아무리 어린 시절의 동무라고 늦은 밤에 남녀가 유별하니…….”
“아, 물론이오.”
너무나 빨리 제 말을 받아들이는 인선 때문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이규 저였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는 인선 곁을 지나 문지방을 넘으려는 찰나 낮은 목소리로 보태는 인선의 말이 이규 저를 강타했다.
“그럼 그렇게 오래오래 같은 담장 안에서 살아 보지요. 그것이 정말 도련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그럼 편안히 쉬세요.”
“…….”
평소에도 인선이 제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긴 했지만 왠지 다른 날과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게 거리를 두는 인선에게 느닷없는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 헛웃음만 나왔다. 제가 원했던 것이었다. 제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놓고 멀리 떨어져 서 있다고 서운하다니 인선이 제 진짜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게 서둘러 안전한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