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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떠난 후, 홀로 링크에 남은 연우가 타월로 뻣뻣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빛을 등에 진 남자가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실루엣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도 이승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하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텅 빈 링크 안에 탕 하는 쇳소리가 메아리쳤다. 커다란 링크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지만,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미열처럼 페어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이 시간까지 링크 위에 있다니…….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 자고. 지연우 선수가 쉬지 않으면 내 일도 끝난 게 아닌데, 체력 없는 평범한 난 죽어나요.”
다가오며 던진 승하의 투정 아닌 투정에 연우가 치, 하고 웃었다. 일어나서 타월을 펜스에 걸며 허리를 구부려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니 승하가 다가와 앞쪽에 서는 게 느껴졌다.
“안 피곤해요? 난 죽겠는데.”
펜스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별로. 잘 모르겠어요. 내일 일찍 나가야 하긴 해요.”
연우의 대답에 승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일? 왜요?”
“스폰서 쪽이 원하는 홍보 활동 참여.”
연우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하영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마냥 쿨하진 않았다. 그리고 침묵, 잠시 그대로 발밑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땠어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던 승하가 움,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시큰둥하게 시선을 링크의 구석으로 던졌다.
“왜요?”
문득 불안해져서 재촉하자 승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어요.”
“왜요?”
“내 맘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야만 하니까.”
“좋았다는 뜻이네요.”
승하가 눈을 깜빡였다.
“매우. 몹시. 굉장히.”
빠르게 찬사를 던진 승하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제일 좋았던 부분을 물어봐요.”
그냥 말하지…… 하고 입을 비쭉거리면서도 어쩐지 재미있어 연우가 물었다. 이렇게 나오면 또 궁금하긴 한 것이다.
“제일 좋았던 부분이 어딘데요?”
“날 이 기자가 아니라 승하 씨…… 라고 부른 부분.”
“뭐예요?”
어이가 없어 연우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예측할 수 없다. 반대라고 하면서 페어에 대한 조언을 하더니, 페어 자체는 좋았다고 하면서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라고 한다.
휘둘린다.
“난 연애할 생각 없어요.”
단호하게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재수 없게 들리는 것 같다고도 걱정하며 연우가 승하를 올려다보았다.
쩡, 하고 얼음이 낮게 울었다.
정적.
연우는 아직도 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기로 했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승하를 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몸을 획 돌려서 링크 한가운데로 미끄러졌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 멈춘 그녀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링크를 제외한 곳의 조명은 꺼진 상태라 어둠 속에 있는 그의 얼굴은 식별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그대로 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시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어둠 속에 잠긴 그의 실루엣은 마치 오래되어 형체가 흐트러진 흑백사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연우는 문득 그의 눈에 그녀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미리보기]

문득 어떤 예감이 스쳤다. 때론 시선이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걸 어지러운 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었다.
착각이 아닐까? 너무 간절히 원하고 생각해 실낱같은 기색에 희망을 품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아닐까?
“그럼 도 해요.”
머리가 이상해지는 거 같다. 아니, 입이 미쳤다.
연우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그래, 이해한다. 누군가 그에게 이런 순간 이런 말을 했다면 그도 상대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을 거다. 열 때문인지 심장도 뜨겁다. 그러니까 자꾸 말하지만, 그 때문이다.
“미, 하기 싫으면 도, 하라고. 나한테는 항상 연우 씨가 처음이고 최고니까 도레미파솔라시도, 할 때도 도고 도개걸윷모할 때도 도고, 연우 씨가 항상 도 해요.”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결국 연우가 픽 웃어 버릴 때까지 그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난스레 그의 말을 받은 연우가 뭔가를 더 이야기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들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남자들이 ‘당신 아버지는 도둑, 별을 훔쳐다 눈에 박았네.’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날 선 듯한 표정의 지연우도 예뻤고, 문득 웃어 주던 그녀도 예뻤다. 장난스럽게 그에게 다가오던 그녀도 예뻤고, 망설이듯 고개를 숙이던 그녀도 예뻤다. 그러나 오늘, 한없이 차분하고 조용한, 며칠 사이에 자라 버린 것 같은 지연우는 조용한 호수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아름다웠다.
[연우, 리허설이야!]
연우가 대답하고 다시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가야죠.”
먼저 말을 꺼낸 건 승하였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장하영은, 잘해 주죠?”
아아, 말하지 말걸 그랬다. 스스로가 구차하여 승하는 그녀가 이 방을 나서는 즉시 저 쉐비그린의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맹세했다. 아주 세게, 은혜를 갚는 까치처럼.
“언제나처럼 잘해주죠. 성격이잖아요.”
“그래도 사귀면 더 잘해 주겠죠?”
두 번, 아니, 세 번 박는 거다. ……나이만큼, 아니면 살아 온 나날만큼?
귀 끝이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홍조증은 없지만 어쩌면 얼굴이 조금쯤, 빨개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라면 코를 덮고 있는 목도리 때문에 그녀는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거.
그래, 마녀 말마따나 차라리 무릎을 꿇고 비는 게 낫다. 기대하고 떠보고 눈치보고…… 이건 너무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사귀어요? 나하고 하영 선배가요?”
연우가 천천히 반문했다.
“연우야!”
밖에서 장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잠시 그대로 연우는 그를 바라보았다.
승하는 귀 안에서 희미하게 이명이 울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공간도. 어지러웠다.
모든 것은 굉장히 느릿느릿 일어났다.
조금 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연우는 손을 뻗어 코끝까지 추켜올린 그의 목도리를 잡아 끌어내리며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 그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생일 축하해요.”
그녀의 속삭임을 들은 것 같다. ……아니면 환청일까?
정신을 차렸을 때 연우는 의자에 걸쳐놓았던 저지 점퍼를 집어 들고 대기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끝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방금, 기절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