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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세상에는 순수한 [키다리 아저씨]는 없을지도 모른다. 쥬디를 사랑한 저비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갈 신우에게 이화우는 사랑하는 여자의 딸이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였고, 이화우에게 제갈 신우는 키다리 아저씨이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복수조차 달콤했고 결국은 도망치는 길 외에 화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망간 그녀를 다시 데리고 와서 그녀만의 영원한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싶은 남자 신우는 그녀 곁에 있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태서 군. 이상한 일은 말이지. 그렇게 내 삶으로 갑작스런 사고 피해자로 뛰어든 화우가 밉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화우는 8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내게 치명적인 사고의 후유증으로 남아 버렸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내심 기뻐할 정도로 내게는 둘도 없는 가족이기도 하고. 참, 자네도 그 소문 들었나?”
“……?”
“내가 로리타 콤플렉스라고 자랑스럽지 못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
그건 마치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전혀 어른답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태서가 당당하게 화우를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 심술보가 터져 버린 아이처럼 제가 가지지 못하는 장난감이라면 다른 아이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의 흠집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낳은 비겁함의 산물이었다.
“태서 선배, 아저씨. 어서 들어오세요. 아주머니가 식사 준비 다 하셨대요.”
화우가 현관문을 열고 서서 두 사람을 불렀다. 나풀거리는 쇼트 화이트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앙증맞은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짓에 조금 전까지 어색한 기류가 흐르던 두 남자는 활짝 웃으면서 천천히 그녀가 기다리고 서 있는 현관으로 걷기 시작했다. 별다른 일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의 뒤로 하늘을 나는 이화 꽃잎이 한층 더 아름다운 꽃비를 뿌렸고 화우가 서 있는 현관에까지 꽃잎들이 날아왔다. 그중 한 잎을 손에 든 그녀는 엄마의 일기장에서 본 그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떠올렸다.
[사랑하는 그와 처음으로 키스한 순간, 하늘에서 이화우가 내렸다.]
엄마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이화우가, 그녀에게는 붉은 복수의 핏빛보다 더 섬뜩한 아픔으로 남은 이화우가, 두 남자 뒤로 흩날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의뢰한 검사 결과서가 도착하려면 아직 며칠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꾸만 마음 여리고 소심한 여자아이 이화우의 본성이 그녀로 하여금 제갈 신우를 용서하라고 속삭이고 있어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어쩌면 부녀지간일지도 모르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완전 배제하고 싶어 의뢰한 검사서였다. 단지 그녀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그 당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에 온갖 힘을 다해 매달리고 싶어 하는 진짜 이화우를 완전히 버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누누이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사실은 제갈 신우라는 따뜻한 사람을 향해 흔들리는 스스로를 단죄하기 위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그를 의식하며 최대한 환하게 태서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내리는 꽃비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에 그가 눈길을 거두지 못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순수한 그녀의 미소로 태서의 눈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미리 보기]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기대서서 말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그를 견디기 힘들게 하는지 모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더 견뎌 낼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얼굴로.
수많은 이유들이 그의 안에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수많은 이유들이 또 속삭이고 있었다.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냐고. 불륜도, 근친상간도 아닌데 왜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냐고.
“화우야…….”
나지막이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오자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따뜻했다. 5년 전 그녀가 떠나기 전, 몇 번. 그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라 생각하고 복수를 위해 계획적으로 훔친 입술과는 다른 것이었다. 떨리는 입술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 다른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 온몸이 진동머신 위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떨리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읍. 아, 안 돼…….”
처음 동공이 확 열린 듯 크게 뜨인 눈과 그녀의 몸을 밀어내기 위해 뻗었던 손과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그녀의 온기를 접하고 나자 밀어내야 한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멈추고 말았다. 마치 세상이 멈춰버린 듯 그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았고, 세상의 잣대도 시선도 그 어떤 것도 그의 원초적인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기에, 너무나 깊은 갈망이었기에 그는 늪에 빠진 짐승처럼 그 어떤 발버둥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 같았다.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그대로 두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의지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입술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관계로 지독하게 차가웠다. 몇 번인가 어설픈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을 노크하기 시작하자 어느 틈엔가 그녀의 따뜻함에 전염이 된 것인지 그녀의 온기를 더 깊이 빨아들일 듯 입술을 열고 그의 차가움을 한껏 실은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그가 그녀의 키스에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놀라 몸을 움츠리던 그녀도 어느새 그에게 열기를 기쁜 마음으로 나눠 주려는 듯 그의 차가움을 안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조금 더 강하게 그의 차가움을 그녀의 따뜻함으로 에워싸고 그의 가슴에 있던 손을 뻗쳐 목덜미 뒤로 휘감고 좀 더 그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는 열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그에게 온전히 매달린 채 망각의 시간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을 꼭 안은 두 팔에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로서의 욕망을 실은 그는 그 어떤 세상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공간을 그녀와 단둘이서 걷고 있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깊은 욕망으로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어 흘러나온 신음 소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그녀를 갈구하고 있던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신호가 되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였다. 그것도 아직 11시 전의 그의 집 어귀였다. 그것도 그가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그를 알고 있는 골목 어귀였다.
그곳에서 이성을 망각하고 그녀를 안고 짙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 충격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떨게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 맛본 그녀의 입술을 다시 갈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는 그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그 자신이 드디어 미치고 만 것이었다.
“이런 젠장…….”
“저어…….”
“미안하다. 아저씨가 여자를 안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나 보다. 너한테 무슨 짓인지…….”
“아저씨……. 그러지 말아……요. 그런 것 아니란 것 알잖아요?”
“아니……. 아냐. 그래야만 해.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그만 가라. 늦었다.”
다시 훌쩍 혼자 익숙한 차가움 속으로 도망친 그는 그녀가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두려운 전염병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그의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우물 속으로 빠진 짐승의 그것처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는 그녀의 두 눈에도 다시는 그가 그녀를 돌아봐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