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대공 각하. 저를 각하의 부인으로 맞아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정부인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디야 제국의 2황녀 세이레이아. 검은 숲의 맹약을 맺기 위해 그녀와 영혼의 쌍둥이인 이세계(異世界)의 정예연을 불러냈다.
외모 빼고는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인데, 중원에서 거칠게 살아가던 예연이 과연 황녀의 대역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세이레이아로부터 넘겨받은 기억 중 이 모멸스럽고 수치스러운 장면은 무엇이지?
“대공 각하.”
“이제는 이름을 불러도 되는 사이지 않습니까?”
“……그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익숙해지도록 하십시오. 저도 마마라는 호칭 대신 세이레이아 님이라 부를 테니까요.”
2. 작가 소개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위험한 휴가』, 『매의 검』, 『화잠』, 『어긋난 휴가』를 냈다.
3. 차례
#애심(愛心) (2)
#남부, 나바르
#긴 밤 (1)
4. 미리 보기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카타하르가 흠칫했다.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말했다.
“잠깐 들어갈게요.”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카타하르가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으로 감추고 있던 표정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문을 두드린 세이레이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이레이아는 침대 기둥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쉬는데 방해한 건가요?”
“아닙니다. 저보다 연 님이야말로 푹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내일 출발하면 지금처럼 여유 있게 쉴 기회는 없을 겁니다.”
귀찮은 황녀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
“출발을 하루나 이틀 정도 늦출까 해요.”
“연 님?”
의아해하는 그를 세이레이아가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타나르와 함께 대공가의 맹약을 비트는 시도를 할 거예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틈을 벌릴 수 있도록.”
“안 됩니다! 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절대로 당신의 힘을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세이레이아의 조용한 반문에 강하게 반발하던 카타하르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당신이 제 손을 잡은 것은 당신에게 걸려 있는 맹약을 부수는 데 제가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죠. 나 역시 그걸 인지하고서 당신의 손을 잡은 거구요.”
잠시 말을 멈춘 세이레이아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어깨선과 이어진 흰 목선이 드러났다.
“설마,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죠? 처음부터 우린 서로의 목적을 알고서 손을 잡은 거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소리 높여 추궁하는 것보다 더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보이지 않게 깊이 찔린 상처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진실이기에 반박하거나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분명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그랬습니다. 당신과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손을 잡은 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당신의 안전을 걸 수는 없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당신도 지금 본인이 어리석은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이 세상에 완벽하게 안전한 일이 있나요? 어떤 일에도 위험은 따라요. 그걸 알고 감수하는 것일 뿐.”
“그 대상이 굳이 연 님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계속 억지를 부리는군요. 그렇다면 왜 내가 계속 당신과 손을 잡아야 하죠? 잊지 마세요. 내가 당신의 도움을 받아 에반의 안전을 도모한 건 우리가 동맹관계였기 때문이지, 일방적인 동정을 받고자 한 게 아니에요!”
“동정이라니? 그 무슨……?”
카타하르가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서늘한 얼굴을 한 세이레이아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정이 아니라면 뭐죠? 나는 카타하르 님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어요. 그런 관계는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오래갈 수도 없죠. 아시지 않나요?”
아무리 동등한 위치라 부르짖어도 한쪽에서 퍼주기만 한다면 수평을 이루던 저울은 어느새 점점 기울어 종래는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히게 된다.
뭐라 답하고 싶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카타하르는 주먹만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싶었다.
당신이 제 품에서 안락하게 편히 쉬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랬다간 역효과만 날 것이다.
간신히 좁힌 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보다 더 높은 벽이 세워질 거다.
그의 침묵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세이레이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카타하르 님에게 걸려 있는 맹약은 대공가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이대로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황제의 명으로 카타하르 님과 검을 겨눠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아니, 분명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황제가 당신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이번만은 카타하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너무나 확연한 미래였기에.
“……아마 연 님의 예상대로일 겁니다.”
황제에게 카타하르는 가장 유용하고 확실한 검이다.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있는.
제 손에서 벗어나려는 세이레이아를 두고 볼 황제가 아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틀림없이 카타하르를 그녀에게 들이밀 것이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란 그런 것이니까.
“카타하르 님을 적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려면 어떻게든 카타하르 님이 차고 있는 목줄을 해결해야겠죠.”
“하지만 사타나르가 연 님에게 부담이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칫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위험하더라도 감수해야겠죠. 그리고 주신은 내가 아직 필요할 테니,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예요.”
시킬 일이 남아 있으니, 주신이 알아서 그녀의 목숨을 챙겨주겠지.
카타하르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무작정 저지르고 보자는 겁니까?”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어깨를 으쓱한 세이레이아가 별일 아닌 것처럼 덧붙였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이야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
중원에서도 적이 꾸민 함정에 일부러 빠진 적도 있고, 바닥난 내공을 억지로 끌어모으다 단전이 부서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지인의 배신에 칼을 맞고 도망치기도 했고,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인질을 구하기도 했었다.
무사안위만을 바랐다면 사타나르와 세이레이아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지금 같은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카타하르 님의 생전에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한번 놓친 기회는 쉽게 다시 오지 않는 법이죠.”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잔인한 사실에 카타하르는 더 이상의 항변을 포기했다. 그녀의 말대로 예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나마도 없었을 기회였으니까.
“미룰 필요가 없으니까, 오늘 저녁에 바로 시도하도록 해요. 사타나르에게는 제가 말할게요. 필요한 다른 준비는 그가 알아서 하겠죠.”
보나 마나 사타나르는 온몸으로 하기 싫다 외치겠지만, 이미 발을 담근 것은 고사하고 정수리 끝까지 푹 잠긴 이상 벗어날 길은 요원했다.
해야 할 말을 끝낸 세이레이아가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카타하르가 황급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가 그를 돌아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말갛게 올려다보는 시선에 카타하르는 숨이 막혔다. 조금씩 답답하게 죄어오던 가슴이 지금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적이 되어 검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심장을 향해 검을 휘두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심장에 뾰족한 얼음가시가 꽂혔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를 향해 검을 겨눈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바스라질 것 같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요?”
“단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연 님의 결정이 무엇인지.”
대답을 듣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망설이기는 하겠지만, 상대해야만 한다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서로 각자의 사정을 각오하고 싸움에 나서는 것일 테니까. 상대가 당신일지라도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맞서겠죠. 그게 적으로 마주한 카타하르 님에 대한 예의이니까요.”
“적에 대한 예의입니까?”
“그게 당신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물론, 그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지금 움직이는 거구요.”
그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세이레이아는 생각했다.
당연히 다음 수순으로 붙잡고 있는 그가 소매를 놔줄 거라고.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타하르는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끌어당겨 벌어진 거리를 좁혔다.
놀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의 말랑한 분홍색 혀가 그의 시선을 잡았다.
“카타하르 님?”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동안 느긋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마치 비웃듯이 이제 와 발목을 잡았다. 남부에 도착한 오하라와 스테판의 재촉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의 선에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슬슬 벗어났을 때였다.
당장 사타나르에게 가서 대공가의 맹약을 비트는 것을 준비해야 하는데, 왜 카타하르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그녀만 이리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마음이 급한 걸까?
“만약 우리가 적으로 마주친다면 말입니다.”
“네?”
감정이 담긴 카타하르의 나직한 음성이 막 그에게서 벗어나려 힘을 주던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는 검 끝에 당신의 심장도, 제 심장도 올려놓지 않을 겁니다.”
심해보다 더 깊은 눈빛으로 건네는 말에 세이레이아는 그게 과연 가능하냐는 질문이 쏙 들어갔다. 그녀의 혀를 꽁꽁 묶어버린 카타하르가 다시 말했다.
“반드시 당신을 끌어와 제 옆에 세울 겁니다. 그도 아니면 제가 당신의 옆으로 갈 겁니다. 서로 적이 된다면, 다시 동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당신의 약점을 찾아내고, 동정심에 기댈 겁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검을 피할 겁니다. 제 검이 당신을 향하는 일도 없도록 할 겁니다. 제 팔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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