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아나이스 여신이시여. 이것은 당신의 안배입니까.

마왕의 제물이 된 공주 세레니안.

마법진 위에서 눈을 뜬 그녀 앞에 펼쳐진 세상은

300년 후,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엄마, 예쁜 언니가 깨어났어요!”

“아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만 쉬더니 드디어 눈을 떴네. 어디 정신이 좀 들어요?”

왕국의 자랑이던 공주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고,

설상가상 그녀의 상징인 은발과 은빛 눈동자까지 까맣게 변해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뿐.

“나……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요.”

이제 공주, 아니 수습하녀 세레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발루아 공작이 다스리는 잿빛 겨울성에서!

2. 작가 소개

소리엔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3. 차례

1부

#08. 실종된 공작

#09. 레치넨티아의 의미

#10. 여름 장미 축제

#11. 움직이는 마음

#12. 한여름 밤의 꿈

#13. 마녀 사냥

4. 미리 보기

한참을 수를 놓는 일에 열중하던 그녀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서 둥근 만월이 환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보름이로구나.’

“마왕, 혹시 각하께서 어디에 가셨는지 알아?”

세레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파에 누워 있던 검은 고양이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암, 몰라. 뭐 별일 있으려고. 그놈이 가진 무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이 아닌데.”

지난 보름날 알아차린 사실인데, 마왕은 고양이의 몸을 하고서도 말을 할 수 있었다. 어쩐지 얄밉게 들리는 고양이의 말에 세레나가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성을 비우신 건 처음이라 어쩐지 마음이 쓰인단 말……, 아얏!”

수를 놓으며 대화까지 시도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는지 그만 손가락을 바늘에 찔리고 말았다. 세레나가 피가 송송 나는 손가락을 가슴께보다 높이 들고 있으려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뛰어와 그녀의 상처 부위를 할짝였다.

기분이 나빠진 세레나가 얼른 손을 치웠지만 고양이는 가르릉 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음, 이 달콤한 마력……. 좋아, 모처럼 힘이 나니 내가 선심 쓰마. 놈이 어디 있는지 찾아주지.”

눈을 감고 집중하는 고양이의 전신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고양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온통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뭐?”

“평범한 장소에 있는 것 같지 않아. 어쩌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더 보고 싶다면 내게 피를 좀 더 줄래? 그럼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까지 제대로 봐주지.”

유혹처럼 들리는 그 말에 세레나는 망설여졌다.

‘나는 ‘마왕’을 신용할 수 있나? 피는 대체 얼마나 더 주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이대로는 마냥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아예 몰랐다면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위험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단도를 꺼냈다. 마왕을 처음 만난 날 손에 쥐었던 것인데, 이렇게 스스로에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을 질끈 감은 세레나가 과도로 손바닥을 긋자 선홍색 피가 솟아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양이는 곧장 바닥에 뛰어들더니 게걸스럽게 그것을 핥았다. 선연한 보라색으로 변한 눈동자를 빛내며 고양이는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했다.

“어이쿠, 열심히 판 지하도가 그만 폭삭 내려앉았군. 세레나, 공작은 깊은 땅속에 파묻혀 있다. 서둘러 구하지 않으면 꼴딱 숨이 넘어가겠는걸!”

놀란 세레나가 물었다.

“거기가 어디지?”

“그란데 산맥. 네가 머물렀던 그림자 숲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세레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남자가 좋아서 이러는 건 결코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좋지 않은 사건으로 얽혔다 해도 한 사람의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그대로 간과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그는 성의 식솔들을 포함해 거대한 영지와 영지민들을 다스리는 이곳 북령의 장이었다.

밖으로 달려 나가려던 그녀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마음은 급했지만 공작을 구하는 일은 혼자서 해내기엔 너무 벅찼다.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지?’

말을 탈 줄 알고 땅을 팔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닌, 믿을 수 있는 사람. 세레나는 곧 유벨의 호위 기사 비토리오를 떠올렸다.

탕탕. 탕탕탕.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비토리오가 부스스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자 거기에는 도련님의 시녀인 세레나가 서 있었다.

늦게까지 호위를 서다 잠시 눈을 붙이러 들어왔던 비토리오는 그만 잠이 홀딱 깨는 것을 느꼈다. 이 아가씨가 여기엔 웬일이지? 내 숙소는 어떻게 알고. 혹 도련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가?

“어쩐 일이오? 이 야심한 시각에.”

“비토리오 님…… 공작 각하를 구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비토리오의 입이 벌어졌다.

“그게 무슨?”

“각하께서 위험에 처해 계십니다. 절 믿으신다면, 당장 저와 함께 말을 타고 그란데 산맥으로 가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갑자기 찾아와서는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요?”

비토리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다급해진 세레나가 손으로 문을 잡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이에요. 거짓이 아닙니다. 출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제 말이 진실이라는 쪽에 이 목이라도 걸지요. 설령 아니라손 쳐도 기사님은 어차피 말을 타고 가셨다 그대로 돌아오시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지켜봐온 세레나라는 시녀는 분명 허튼소리를 할 성격은 아니었다. 사납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린 비토리오가 말했다.

“그런 얘기라면 기사단장님께 올리는 편이 좋겠소. 날이 밝는 대로 조사단을 파견하고 병력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말씀드릴 테니 염려 놓으시오.”

“안 됩니다!”

세레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각하께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훌쩍 떠나셨다 위험에 처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몸을 움직이신 건지, 위험에 빠지게 만든 원흉이 누구인지도 아직 알지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성의 사람을 움직일 순 없지 않습니까.”

“그건…….”

“부탁이니 제 말을 한 번만 믿어주세요. 오늘을 놓치면 분명, 큰 후회를 하시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