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날 사랑해요? 나 같이 모자란 게 많은 여자를? 당신같이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세상엔 참 두려운 게 많았고 숨고 싶기만 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낳은 딸이 다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자신 안으로만 들어앉았던 여자, 진미우.

“내가 당신 이해한다 그러면 그건 정말 사기 치는 거고. 다 안다고 말해도 다 거짓말이고. 난 내가 있는 곳에서밖에 당신 이해 못해. 그건 맞아.”

“내 뒤에 숨어만 있어요. 내가 바람막이도 되고 우산도 되고 하여간 뭐든지 다 되어 줄 테니까. 제발 거기서 그냥 나랑 연애만이라도 제대로 좀 해 봅시다.”

처음부터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주었던 그녀.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 여자, 진미우.
그 여자를 무작정 사랑하게 된 그 남자, 박인욱.
그 건조하고 남에게 관심 없던 그가 그녀에게 젖어들기 시작해서 어느새 전부가 되어 버렸다.


16년 전에 만났던 너.
그때 내가 널 잡았더라면. 
그때 내가 널 한번만 더 돌아보았더라면.
결국 너였는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사랑이었고 그 사람이 너였는데.

그 언제가 되어도 내 사랑은 당신이었을 거야.

그래요, 당신 그거 알아요? 
우리 사랑은, 그래서, 언제나 맑음.

-본문 중에서-

 

“미팅? 미팅은 무슨 얼어 죽을 미팅.”

인욱은 콧방귀를 뀌며 책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떠났다.

“야! 인원이 모자라서 그런단 말이야. 한 번만 해!”

“그 시간에 잠이나 잘란다.”

진현이 사정하듯 따라왔지만, 인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욱이 순순히 그러겠노라 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거센 반응 앞에 진현은 실망을 넘어서 화마저 났다.

“야! 너 정말 그럴 거야! 여자애들도 죽이게 예쁘다 그랬단 말이야!”

“넌 그걸 믿냐.”

계단을 내려가는 인욱의 등은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다.

“예쁘면 어떡할 건데!”

“뭘 어째. 넌,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는 새끼가 시간도 많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공부만 죽어라 하는 모범생은 아니잖아.

그러나 진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돌아섰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더 말하기 싫었다. 한 명이 부족한 대로 나가든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아무 놈이나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미팅은 무슨 미팅.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인욱은 학원 정문을 나서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엔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밸런타인데이인지 뭔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현이 호들갑을 떠는 걸 며칠 전부터 봐 왔다. 아마 그 전에 여자친구를 하나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중학교 3학년 올라가는 어린애를 여자친구 삼아서 뭘 어쩌려고.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해도 엄연히, ‘고등학교’와 ‘중학교’가 주는 뉘앙스는 달랐다.

인욱은 가방에서 이어폰만 길게 잡아당겨 귀에 꽂았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인욱의 그림자가 길었다.

그렇게 진현이 놈이 호들갑을 떤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 딴에는 제법 맘이 상했는지, 일주일 동안 본체만체하는 게 가소로워 인욱 역시 별말을 걸지 않았다.

“인욱아. 주말에 뭐해?”

학원에서 진현이 친구놈으로 만나 안면을 트게 된 진성이란 놈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서던 길이었다. 진성이란 놈이 제법 친근한 척 군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인욱은 너는 뭐하는 놈이냐, 라는 듯 쳐다보기 일쑤였다. 오늘도 그랬다.

“뭐 하기는. 공부하지.”

“영화 보자.”

“내가 너하고 왜 영화를 보냐.”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같이 가자.”

“싫어.”

“내 여자친구도 소개시켜 줄게.”

여자친구란 말에 인욱의 발걸음이 멎었다. 제법 수줍은 듯 얼굴까지 은근히 붉히고 있는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다. 지난번에 진성이 진현과 같이 미팅을 나갔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지난번 미팅의 결과물이 궁금하기도 했다. 진성의 여자친구가 별로 예쁘지 않으면 이걸 기회삼아 진현을 며칠간 더 골려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진성이란 놈은, 안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친한 척 구는 게 아주 능숙한 놈이었다. 어느새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새꺄. 뭐, 너는 내가 부탁하면 들은 척도 안 하면서, 웬일이냐? 영화 보러 왕림을 다해 주시고?”

“닥쳐.”

생각보다 진성이 약속시간에 늦어 진현과 둘이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지루함을 참지 못하던 인욱이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딱 10분만 더 기다린다. 그래도 안 오면 가 버릴 거다. 남자 둘이서 이게 뭐야. 볼썽사납게.

인욱이 그렇게 벼르고 있는데, 패스트푸드점 입구에 진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진현이 손을 들어 외쳤다.

“여기야! 빨리 와!”

“아, 미안. 정말 미안. 늦었네.”

인욱과 진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온 진성은 숨을 헐떡이며 사과했다. 인욱은 건성으로 진성이 하는 말을 들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진성이 손을 꼭 잡고 있는 하얀 얼굴의 여자아이를 살피는 중이었다.

“인사해. 얘는 내 여자친구 미우야, 진미우.”

“안녕하세요? 진미우라고 합니다.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상큼하게 웃은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늘 꿈을 먹고 사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 ― 남편과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로망띠끄와 작가연합홈피 <기억의 습작>, 개인카페 <강해랑의 이야기터>에 늘 출몰하고 있다.

출간작
<어느 날 남편이 생기다>, <붉은 강>, <조금은 아프게, 조금은 달콤하게> <블루문 특급 bluemoon 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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