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몇 번 부딪치고 보니 그들에게도 거친 말이 튀어나갔다. 어린 자신의 말투에 건방짐을 느낄 만도 한데 그들은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늘 그렇듯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차에 태웠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커다란 덩치 사이에 낀 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답답한 마음조차 마음대로 풀지 못하게 하는 사장의 처사에 화가 났다. 집 안에 들어가면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의 두 다리로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었다. 

할아버지!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극심한 아픔에 서연은 큰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할아버지가 죽은 뒤로 무덤을 의식적으로 찾지 않았다. 만에 하나, 산소에 가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의 추억은 기억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어렵고 힘이 들었다. 목적도 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정신없이 걷다 지치면 찜질방으로 가 잠을 청했지만, 한 번도 깊은 잠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외톨이었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상태였다. 

친척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남들은 그렇게 많은 혈육을 갖고 있는데 왜 나만 혼자인지……. 투정할 사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라는 사람 못 본 것처럼 해주면 안 되나요?”

간절한 부탁이었지만 그들은 그녀의 말을 아예 귀담아 듣지 않았다. 마치 청각 장애인처럼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누가 절 데려오라고 했나요?”

알고 있으면서 오늘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차가 집 현관에 멈춰 서자 서연은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황 씨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선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창가에 서서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숨이 멈춘 것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성주 건설의 유한섭은 적선을 베푼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할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서연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을 의식한 순간, 숨을 삼켰다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 

“외출은 즐거웠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온 곳을 다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그녀가 제어하기도 전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2권

“그래, 그럼 한 가지만 묻겠다. 지금도 내게서 자유롭고 싶니?”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서연의 안색을 살피며 한섭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연을 보며 여유를 부리는 입장에서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서연이 혼란스러운 만큼 자신 역시 그랬다.

“그러고 싶습니다.”

결심이 섰는지 서연의 표정은 무감각했다.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것을 멈추고 한섭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자신이 던질 말에 서연이 얼마나 태연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낮추며 호흡을 조절했다. 지금 자신이 내건 조건을 듣고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질 낮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일인지도 모르잖니.”

“사장님이 생각하신 거라면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서연의 대답에 이번에는 자신이 더 놀라고 말았다. 한섭은 정신없이 콩닥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마주 보지 못하는 서연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주 힘든 일일 수도 있어.”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또다시 그녀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는 것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섭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기도 전에 다시 내려놓고 말았다.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서연이 던진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상처가 되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지. 하지만 결정권은 네게 있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서연도, 한섭도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넌 자유를 원하고 난 널 원하니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군.”

불안했다. 서연은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숨을 내쉬었다. 말은 이해가 되었는데 뜻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버린 듯 아무 생각이 없는데도 사장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장은 처음부터……. 서연은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세 번이야. 너를 내게 세 번만 줘. 그러면 그 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널 놓아주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어. 유학을 원하면 유학도 보내주고,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다면 그것도 해주겠어.”

계속되는 사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서연은 머릿속이 하얀 백지로 변해 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세 번이라니……. 조금씩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행여나, 혹시나 했던 예상이 맞아떨어진 순간, 지독하게 엄청난 모욕을 받은 것 같았다. 진심으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네가 원했던 답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앞서 가는 건가?”

상상이 현실이 되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을 저렇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감정 한 자락 싣지 않고 말을 하는지……. 

“도대체…….”

그녀가 말을 끝맺을 사이도 없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육체적인 관계를 얘기하는 거야. 딱 세 번이지.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

누가 놀랐을까? 밖에서 듣고 있던 인혁과 주호, 아니면 서연이었을까? 살얼음판 같은 위태로운 침묵이 방 안을 에워싸자 서연은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막상 직접 듣고 나자 자신이 길거리의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조금씩 희미하게 자신이 그에게 퍼붓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원조교제’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사장을 향해 비난을 퍼부어야 하는데 입천장이 들러붙었는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사장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제 서연은 인정하고 싶었다. 사장이 지상에 남은 마지막 악마라는 것을. 결국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처음부터 절 그런 이유로 데리고 오셨습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외면하는 사장의 눈길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여운이 있는 말에 혹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았지만, 사장의 얼굴에선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알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서연은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글쎄?”

대답을 회피하는 사장을 보며 서연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너무 무거워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씩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노도, 어이없음도 사라져 갔다. 

“만약, 제가 사장님의 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어떤 식의 대답을 듣게 될지 서연은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일 초…… 일 분…….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

“한 번도요?”

“단 한 번도!”

정신이 아득했다. 확신에 찬 어조에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입 안에서 맴을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 말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그녀는 수많은 생각이 지나가는 머릿속을 간신히 잠재우고 눈을 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미 오래전에 유한섭이라는 남자에게 너무 많이 길들여져 버렸다는 것을.

“할 말이 있으면 해.” 

“제가 만약 사장님의 조건을 거절한다면요.”

“그럴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영원히 이 집에서 살아야겠지. 내가 마음이 내키면 널 풀어 줄 테고, 그렇지 않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나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할 거야.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네 결혼까지 막지는 않을 거야.” 

서연은 처음으로 사장을 죽이고 싶었다. 예전에는 죽음으로 그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도 죽고 자신도 죽어 버리고 싶다는 강한 저항감이 밀려왔다. 

“저는 사장님의 혹이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이런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사장님은 제게 수많은 돈을 지불했어요. 지금까지 아무 대가도 없이요. 만에 하나, 제가 성공했다면 절 정말 자유롭게 해주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비웃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인가 할 것 같은데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너무 기묘해 시선을 돌리는 게 쉽지 않았다.

“네가 성공했다면 분명히 놓아주었을 거야.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손해가 많을 텐데요.”

“네게 그런 조건을 제시했을 때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람들은 때론 사업가를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볼 때가 있어. 얼마나 앞뒤를 재는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노예의 신분이었다. 기라면 기어야 했고, 걸어라 명령하면 걸어야 하는. 유한섭에게 자신은 하찮은 존재였다. 

“사장님의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면요.”

“그건 내 마음이야. 만족을 느끼는 것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다는 분명한 의지에 서연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뒤엉키게 했지만 당장 모든 것이 바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티고 피해 가려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십시오.”

“얼마든지.”

명쾌한 그의 대답에, 서연은 폭발하려는 모든 감정을 재빨리 수습했다. 더 이상 앉아 있어도 얻을 게 없다는 것과 자존심만 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조건을 하나 더 내세우지.”

“그, 그게?”

그때까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눈동자가 어느새 냉혹한 들짐승의 눈빛으로 바뀌며 그녀를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사나운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어리석은 짓은 생각도 하지 마. 넌 삼 년 동안 은둔자 아닌 은둔자 생활을 해왔어. 그 말은 네가 남자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얘기야. 만에 하나, 내게 반항할 생각이라면 똑똑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내 분노에 기름을 부을 생각으로 길거리 여자가 하는 것처럼 어쭙잖은 흉내 내지 마. 키스도, 네 몸도 내가 처음이어야 해. 만약 어기면 평생 놔주지 않을지도 몰라.”

경고하는 음성에는 만에 하나 그가 제시한 조건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해도 좋다는 암시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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