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오래 기다렸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나투 제국 사하 기(麒) 가문의 당주, 세이란. 어느 날 세이란은 황제의 모략으로 거의 죽은 목숨으로 쫓겨나 예국 선왕의 아들 류아신을 만나 그와 마음을 나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하룻밤 동안 꾼 꿈이 아닌가! 게다가 그 꿈은 바로 세이란 가문 당주만이 미래를 예견하며 꾼다는 예지몽이었다. 

황후가 된 여동생까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길한 예지몽. 결국 세이란은 예지된 미래를 제 힘으로 바꾸기 위해 쿠혼 산맥 너머 예국 땅으로 꿈속의 남자 아신을 찾아 길을 나서는데…….

“진지하게 묻는 건데, 이대로 나와 혼인해도 후회하지 않겠어?”

“나는 후회 안 해요. 후회할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주의라서. 이 얘기 오래 전에도 하지 않았어요? 근데 또 묻는 건 당신이 후회할 것 같아서예요?”

“……어쩌면.”

“아, 이 남자 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후회할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남자가 어딨어요? 상처받았어요, 나. 엄청!”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깡다케이

반짝거리고 예쁜 로맨스가 좋아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 조아라(www.joara.com)에서 연재 활동 중입니다.

▣ 출간작

템페스트

야만과 이체

기린왕의 상아

3. 차례

#01. 序章 - 초연의 시

#02. 만남 - 두 번째 장

#03. 만남 - 첫 번째 장

4. 미리 보기

별채에 들어서니 방 안쪽 침상 맡에 죽향(竹香)이 풍기는 발 하나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나자 발을 걷고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리인이었다.

“어머님, 잠시만요.”

리인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고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모두가 소리를 낮췄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니? 아까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와본 것인데 내가 시간을 잘못 맞춰 왔구나.”

“오늘 새벽에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에요. 간간히 정신이 들긴 하는데 깨워서 일어나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요.”

대답을 마친 리안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시선을 던진다.

“근데, 여기에 오라버니를 닮은 분은 누구? 제 오라버니는 어딘가 구석진 경계지에 참전(參戰) 중이란 소리를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설마 그분은 아니겠죠?”

비꼬는 방법도 다양하다.

“고모님도 보셔서 알겠지만 항상 시작하는 건 리인입니다.”

인사 대신 시비부터 거는 사촌동생의 모습을 지적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지 못한 척, 듣지 못한 척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그의 고모였다.

“어머님께 곧장 이르는 걸 보니 제 오라버니가 맞군요. 세상에, 다섯 달 전에 봤을 때랑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한결같은 오라버니의 모습에 소녀 깜짝 놀랐사옵니다.”

“너 역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아 안심했다. 네가 마음을 달리 먹어 고모님 의견에 동조할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사내아이였다면 쥐어박기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니 매번 제 속만 앓다 질겁하며 물러나곤 한다. 꼭 사내아이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리인은 다른 집안의 그 또래 규수들과 달리 제 부모를 따라 상단을 꾸리고 돌아다니기 바쁜 망아지 같은 아이였다. 화초처럼 자랄 수도 있는데도 스스로 잡초처럼 자라길 바라 세상 구경을 명목으로 돌아다니니 누가 저 아이를 데려갈까 피붙이로써 걱정이 되기도 했다. 리인의 미래를 염려해 제게 그녀를 붙여주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흥, 제 마음 천년만년 변치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세상의 반이 남자인데 제가 왜 오라버니와 혼인합니까? 오라버니나 아버님, 어머님 설득에 넘어가지 마세요.”

서로 혼인에 관해서만큼은 단결할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근데 어머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라버니가 별채까진 어쩐 일이에요?”

“손님 와 계시다며.”

“설마 오라버니가 손님께 인사하러 직접 온 거예요? 세상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 이러는 겁니까? 전쟁터에 나갔다더니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에요?”

놀라는 시늉을 하는 리인에게 손이 올라가는 걸 꾹 눌러 참는다. 그리고 그녀의 건방진 언사를 무시하고 본래 이곳까지 온 목적대로 발이 드리워진 곳 너머를 살핀다.

“어디서 오신 손님입니까?”

“나투에서.”

또 나투. 갑작스럽게 나투에 갔던 이들치곤 나투와 관련해 쏟아져 나오는 게 많기도 하다. 인사를 하러 왔는데 취침 중이라 하니 대체 어떤 손님인가 발 건너에 가만 누워 있는 이를 가늣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발을 거두고 문턱을 넘으려 하니 뒤에 서 있던 리인이 재빠르게 그의 옷을 붙잡는다. 

“어머, 숙녀분이 주무시는데 지금 무슨 실례예요? 오라버니!”

잠을 청하고 있는 이가 여자라는 걸 말해준 적도 없지 않은가. 물론 남자가 누워 있다고 하더라도 실례를 범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안면을 트기 위해 두 번이나 걸음한단 말인가.

“아픈 분이란 말이에요.”

“그래,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니 다음에 다시 인사하러 오자꾸나.”

다시 발을 걷고 나오니 두 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몸이 안 좋으면 의원에게 데려가시지, 왜 이곳으로 데려오신 겁니까?”

“우리가 약재도 취급하고 있지 않니. 제일 좋은 약이 우리 상단에 있으니 의원에게 약재를 가져다주며 저이를 살피는 것보다 의원을 이곳으로 불러 살피는 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게까지 해서 보살피고 있는 손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투에 무슨 인연이 있어 나투에서부터 데려와 치료까지 하고 있는 건지 그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었다.

“맞아요. 좁고 병자들이 많은 의원보다는 이곳이 훨씬 낫죠.”

“도대체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 사람인 거야?”

“많이요. 그냥 많이.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안 좋아요. 심각하죠?”

리인이 말하니, 진짠지 아닌지 도통 구분이 가질 않는다. 과장을 하며 장난치는 것도 같아 인상을 찌푸리지만 리인의 말처럼 심각한 것이든 아니든 아프다는 것만큼은 진짜인 듯했다.

“그러니 여기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보는 게 어때요?”

“인사를 하러 왔으니 인사를 하고 가야지.”

“오라버니는 진짜 이상한데서 집요하더라? 다음에 인사하면 되지, 뭘 또 지금 하겠다고 그러는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기다릴 거예요, 정말?”

“바쁘면 넌 나가보든지. 고모님도 나가보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그의 고모는 나중에 손님이 깨어나거든 얘기를 해달라는 소리를 남기곤 방을 나섰고, 리인은 방에 남았다.

“오라버니를 어떻게 믿고 이 방에 혼자 두겠어요? 저도 이곳에 있겠어요.”

그냥 나가면 좋았을걸. 그가 혀를 차며 퉁퉁거렸다. 별채에 리인과 덩그러니 남아 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다.

“나투에서부터 저런 상태였어?”

“네. 저는 아버님이 시체를 안고 오신 줄 알았어요. 그때 어머니랑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려요.”

리인의 적나라한 표현에 그의 얼굴이 가볍게 구겨졌다.

“왜 그런 사람을? 고모부님이나 고모님이 책임져야 할 만한 그런 사고라도 났었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버님도 어머님도 아는 분인 것 같아요.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으셨지만 두 분 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시니 저도 그리하는 겁니다.”

리인이 그녀답지 않게 동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투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쿠혼 산맥을 넘으려는데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서지 않겠어요? 아버님이 내려서 살피시다가 산맥 초입에 쓰러져 있는 저분을 발견해서 데리고 오신 거예요. 저 몸으로 산맥을 넘으려고 하셨던 건지,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 그러셨던 건지 아버님을 붙잡고 나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다기에 함께 온 거고요.”

여자 혼자 몸으로 제 나라를 등지고 떠나야 하는 사정이 무엇인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예국의 본거에까지 데리고 오니 이 일가(一家)가 과연 제정신인가 염려될 정도였다.

“나투의 사람인 건 확실해? 아니, 그것보다 이상한 일에 연루되어 있는 그런 사람 아냐?”

“소녀, 오라버니의 풍부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리인.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야.”

그러나 리인은 걱정을 걱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마 죄짓고 도망치는 이를 제집까지 데리고 왔겠어요? 그리고 나투 사람인 건 맞냐고요? 나투에서 만났으니 나투사람인 게 당연하죠. 아버님과 어머님도 그곳에서 연이 닿아 면식이 있는 분이라 하니 확실한 거 아니에요? 오라버니도 직접 보면 저분의 국적을 의심할 수 없을 거예요.”

왜냐고 묻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리인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발을 걷어 그에게 손짓해 다가오라 말한다. 자는 사람에게 실례지만 혹시 국적을 바꾼 첩자는 아닐까 의심하는 그를 위해 친절히 확인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걸음을 옮겨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조용히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다본다.

“두 눈으로 보니 알겠죠?”

“그렇군. 확실히 창국 사람은 아니야. 예국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첩자로 영입하려야 영입할 수 없는 외모라고요. 어딜 가나 눈에 띌 텐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간자 노릇을 시키겠어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리인의 말이 옳았다.

아픈 사람이라고 말해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낯빛이, 그리고 이불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과 손목이 핏기 없이 새하얗다. 앞서 시체라 표현했던 리인의 말처럼 창백한 안색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그리고 좀처럼 설명하기 힘든 머리색에 넋을 잃고 내려다봤다. 다갈색과 푸른색이 섞인 머리를 한 이들도 있었다. 검은색 일색인 머리를 하고 있는 이들 틈 사이에서 그런 이들도 특이하게 바라보곤 하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은 원국의 사람들이었다.

근데 이 여자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온통 황금색으로 물든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색소가 옅은 사람은 난생처음 본다.”

“저도 처음 봐요.”

머리맡에서 사람 둘이 대화를 나누는데도 미동 하나 없었다.

“살아 있긴 해? 이러다 괜히 여기서 초상…….”

치르는 것 아니냐 말하려는데 리인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살아 있는 사람 앞에서 그 무슨 망측한 소리예요, 오라버니!”

그러나 리인의 손을 치우며 하려던 말을 끝내 입 밖에 내는 그였다. 처음 몸 상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회복이 되었다고 온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라도 악화될 여지가 있는 이상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옳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대비를 하지 않으니 제가 나서 악역을 자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은 다음에 말하면 늦으니 하는 말이야.”

“무례하기만 한 게 아니라, 무정하기까지 하니 누가 오라버니를 데려갈까 걱정이네요 정말. 이분이 깨어나면 다 이를 거예요. 뭐라고 사과할지 생각이나 해둬요.”

“…….”

진짜 무례한 건 몰라도 될 사실을 전하는 리인이라고 말하려는데 한참 그를 비난하던 리인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사탁을 집어 들며 그에게 물수건을 던진다.

“저는 약을 다려 와야 하니, 오라버니가 잠시 살펴줘요. 방금 전 불온한 말을 내뱉은 것을 뉘우치는 심정으로 정성껏 간호해야 해요.”

“내가 왜 그런 수고스러운 짓을…….”

“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잖아요. 잘됐네, 할 일이 생겨서. 그럼 부탁해요.”

인사만 하러 왔던 건데 왜 정체도 불명한 자의 간병까지 떠맡고 있는 건지 제 손에 들린 물수건이 그를 비웃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병자 앞에서 제 성질을 다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얌전히 물수건을 교체하는 그였다.

창백한 얼굴과는 달리 열이 있었다. 이마 위에 투박하게 올려놓은 물수건을 똑바로 정리해 다시 올려놓는데 아래로 쏟아지는 앞머리를 옆으로 치우려 보니 손에 닿는 황금색의 머리카락이 비단결만큼 매끄러워 인상을 찌푸리고 금세 손을 거두었다.

이상한 느낌에 애꿎은 제 손을 문지르지만 좀처럼 닿았던 감촉이 지워지질 않는다. 한숨을 연사하며 리인이 없는 틈을 타 다시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피싯 웃고 만다. 생긴 게 비현실적이라 그런가? 온기 느껴지는 사람임에도 사람처럼 보이질 않으니 첩자가 아니라도 좀처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장원각에 오래 머물 손님이라고 하지만 과연 몇 번이나 마주칠까 싶었다. 서로 지내는 곳이 장원각일 뿐 생활 자체가 다를 테니 어쩌다 마주치면 데면데면하게 인사하고 대화 몇 마디 나누는 게 고작일 터였다. 일부러 가까이해야 할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으니 서로 통성명을 하고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길게 드리워져 있던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간다.

‘아, 왜 아무도 없는 이때, 깨어나는 거야?’

눈꺼풀이 올라가는 그 잠깐의 순간, 보인 눈동자에 흠칫 놀란 그의 손이 여자의 눈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제 손에 닿는 사람다운 온기(溫氣)에 소리 없이 혀를 찬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람.’

깨어나면 깨어나는 대로 내버려두면 될 것을,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막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진정으로 무례가 무엇인지 보여주니 리인이 봤다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칠게 뻔했다. 난데없이 시야를 가려버리는 행동을 했는데 이를 어찌 수습해야 하나, 모른 척 손을 떼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의 입술이 달싹이며 낯선 목소리 하나가 그들 사이에 말갛게 떠올랐다.

“이 손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앞이…… 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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