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백수연. 나의 이름이오. 그리고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소. 그대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오? 그리고 내 천의는 어디에 있소?”

반복되던 일상에 지친 의대생 수연.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온 꿈속의 제안. 

『키득, 정말로 판타지 세계로 갈래?』

천녀의 신분으로 화나라에 떨어진 수연은 대무녀에게서 황제의 반려의 자리를 제안받지만, 이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언제나 관망하는 자세를 취한다. 황제는 그런 수연이 자꾸 거슬리기만 한데…….

천녀? 천의? 하계? 뭔 말이야, 이게. 설마 진짜로 내가 이 세계로 온 건 아니겠지.

나는 꿈속에서 내 귓가를 맴돌던 말을 떠올렸다. 그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주. 인. 없. 는 천의를 줄 테니 내 능력껏 잘 살아보라고 했다.

그거 꿈이 아니었어?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호즈니

▣ 출간작

황후의 하루(전3권/완결)

3. 차례

#4. 황후의 우울한 하루

#5. 황후의 피곤한 하루

#6. 황후의 즐거운 하루

#7. 민심 나들이

#8. 꿈속을 거닐다

4. 미리 보기

“황상, 피곤하십니까?”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 앞에 놓인 음식들만 끼적대던 황제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허걱, 못 볼 꼴 봤다. 그 늠름하고 아름답던 모습은 어디 가고, 눈 밑으로 내려오는 다크 서클과 얼굴의 뾰루지, 퀭한 눈까지. 마치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자고 컴퓨터 앞에서 게임과 소설에 빠져 있던 나의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설마 황제, 밤새 여인들과 즐기셨나? 그래도 나름 첫날밤이었는데, 정실인 나를 놔두고 다른 여인의 처소로 간 거야? 나 첫날부터 소박맞은 한심한 천녀가 된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한 망할 황제 같으니! 이 몸을 버려두고 다른 여자랑 밤을 보내?

온갖 오해와 망상에 잠겨 있는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입을 살짝 내밀고 갸우뚱거리다가 갑자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가 창백해졌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모습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황제는 필시 콩깍지를 눈에 뒤집어썼으리라. 쯧쯧, 수연이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면, 지금 모습이 귀엽게만 보이지는 않을 터인데. 대신 먹어준 독들 때문에 밤새 끙끙 앓으며 큰 신음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낸 황제가 그저 가여울 뿐이다.

밤새 뭔 짓을 해서 저리 되었든 우선은 눈감아주겠어. 그래도 명색이 황젠데,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수척한 모습에 동정심이 생긴 나는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의아한 눈을 한 황제가 옆에 다가온 나를 올려다본다. 다행히 오늘따라 금안이 무섭지 않았다. 항상 황제가 나를 내려다봤는데, 내가 내려다보게 되니 기분이 묘한걸? 나는 손을 뻗어 수척해진 황제의 뺨을 감쌌다. 으음, 난 피부가 우둘투둘한 남자는 싫단 말야.

“나쁜 기운 물러가라, 때찌, 때찌!”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나는 황제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방긋 웃었다. 물론 죽을지도 모르니까 세게는 안 쳤다. 기본 생존본능은 살아 있으니까. 그렇지만 주변에 경악 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으음, 때찌란 말은 좀 심했나? 그래도 좀 귀여운 느낌으로 때려야 장난처럼 느껴지지. 내가 진심으로 때리고 싶었다는 걸 알면 황제에게 죽을지도 몰라.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이 광채! 자신의 뺨에 댄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황제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처럼 보드랍고 화사했다. 허허허, 이게 뭔 일이야? 아니, 그 전에 내 심장은 왜 이리 콩닥콩닥 뛰는 거지?

황제와 수연이 나름 핑크빛의 신혼 분위기를 내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수경원의 후궁들은 꽃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만에 황제 폐하와 만나게 되니 자신을 돋보이게 할 치장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천녀이자 황후마마를 처음 뵙는 날이었다. 내명부의 모든 권한을 쥐고, 앞으로 자신들에게 내명부 지위를 내려줄 황후였다. 잘만 보인다면 소항아를 제치고 제1황비가 될 수도 있었다. 천녀라 한들 지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픈 여인의 마음은 다를 바 없으니, 총애를 받던 소항아가 제1황비 자리를 차기하기는 요원하지 않겠는가, 하는 간특한 생각이었다.

“이 장신구는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다른 화려한 것을 가져오너라!”

“월궁에 가져갈 것은 다 준비되었느냐?”

“이리들 느려 터져서야 제시간에 준비를 마치겠느냐! 서둘러라!”

“이 옷 문양이 너무 진부하다. 이것 말고 저기 크게 꽃이 수놓아진 것을 가져오너라.”

수경원 내 곳곳에서 후궁들의 궁녀들도, 직속 상궁들도 자신의 주인 요구에 따라 한바탕 요란을 떨며 바쁘게 움직였다. 단, 한 군데를 제외하고 말이다.

수연이 나타나기 전,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소항아의 처소만은 조용했다. 소항아는 평소에 입던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머리 장식도 최소한으로 단순하게 치장했다. 그리고 붉은 비단에 싸인 선물을 탁자에 올려놓고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따스한 김과 함께 아련히 피어오르는 차향을 맡으며 소항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었다.

‘어떤 분이실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지상의 어떤 미와도 견줄 수 없는 그야말로 천상의 미를 지니신 분이라고 했다. 백옥 같은 피부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에,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니신 분이라 했다. 천한 가마꾼들조차 귀히 여기시는 곱디고운 마음씨를 가지신 순수한 분이라 했다. 봉오리에서 수줍게 피어나듯 꽃처럼 아름다운 그분의 미소에 호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다 했다. 그리고, 그리고……. 황제 폐하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유일한 여인이라 했다. 나 같은 건 감히 견줄 생각조차 못하게 너무나도 뛰어나신 분이라, 자신은 한켠이라도 좋았을 폐하의 마음을 모조리 차지했노라고, 그리도 금슬이 좋다고 했다. 그것이 슬프고 아프다. 소항아의 맑은 눈에서 투명한 구슬이 흘러 찻잔으로 떨어졌다.

“언니, 이제 가면 시간 맞겠어요.”

드르륵거리는 방문 소리와 함께 사촌동생인 소유란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은구슬에 푸른 비단 리본으로 장식한 머리와 그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청자색의 옷에 하늘거리는 흰 소매가 아름답다. 그렇지만 말이다. 우리가 최고로 아름답게 치장하여봤자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폐하께는 오롯이 그 마음을 차지한 황후마마가 가장 아름답게 비칠 것이니 말이다.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거짓같이 사라진 소항아는 자신의 사촌에게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황후의 책봉을 경축드리는 좋은 날에 후궁의 눈물은 가당치도 않았기에.

“뭉치이!”

우당탕탕! 새빨개진 얼굴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방에 돌아온 수연은 눈앞의 참사에 소리를 빽 질렀다. 오늘 아침만 해도 황후의 방답게 기품이 넘쳤던 방은 처참하게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조그만 백호묘 한 마리를 잡으려 달려들었던 궁녀들은 얼굴의 붉은 선 자국만 또렷이 새겨졌다. 저것이 여자 얼굴에 상처를 내? 난장판이 된 방보다 궁녀들 얼굴에 새겨진 발톱자국에 더 화가 났다. 여자 몸에 함부로 상처 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눈에 화르륵 하고 쌍심지가 켜진 수연은 두 시간 동안 누구도 잡지 못한 뭉치를 한 손에 쥐어 잡았다. 넌 죽었어! 크르릉거리는 뭉치의 조그만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고 꼬리를 잡고 뱅뱅 돌리고, 마지막으로 전신안마를 해주었다. 키잉거리는 뭉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던 수연은 호접의 목소리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이를 어찌하옵니까. 뭉치 님이 모든 옷을 다 갈가리 찢어놓으셨습니다.”

크아악! 이 사고뭉치 자식! 여기 있던 옷이 얼마나 많은데 다 찢어놨다는 거야? 그럼 내 연회복은? 아니, 지금 당장 후궁들 하례 받을 때 입을 옷은? 아침식사 때 최대한 간소한 복장을 했던 수연이었다. 그 차림으로는 공식석상에 나서기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뭉치, 이 망할 녀석! 장신구도 모조리 아작 내놨어!”

찢어진 옷들 사이로 보이는 비취구슬에 궁녀 하나가 미끄러진다. 그리고 이 아수라장의 원인인 뭉치는 재빠르게 창문 밖으로 뛰어넘어갔다. 서슬 퍼런 수연의 무자비한 손길을 피해. 그리고 그 순간 후궁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 오늘 후궁들은 물리시지요.”

그래도 정상인 옷은 없나 샅샅이 훑어보던 호접이 한숨을 짙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황후로서의 위엄을 드러낼 옷이 없으니, 괜히 나갔다가 후궁들이 우습게보기라도 한다면 황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터! 모시는 주인의 권위가 곧 자신들의 권력이 되는 상궁과 궁녀들이니, 수연이 초라한 모습은 절대 후궁들에게 보일 수 없었다. 찢어진 옷을 치우던 궁녀들도 더욱 화려한 옷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수연을 바라보았다.

미루면, 물론 나야 좋지. 그렇지만 정해진 일정을 미룬다는 것 또한 황후로서의 위엄이 서지 않을 거다. 나 참, 이리도 저리도 선택할 수 없게 만들다니! 뭉치 녀석, 잡히기만 해라. 너 같은 건 쌈 싸서 한입 거리로 먹어버릴 테니까! 애절한 궁녀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비단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국의 진상품에, 자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비단들까지 온갖 것이 종류별로 쌓여 있구나. 다행히 이것은 멀쩡하네.

“호접, 저녁까지 연회복은 가능하겠소?”

“가능하옵니다. 최고의 손재주를 가진 아이들만 선별하여 황후마마의 아름다움에 걸맞게 만들겠사옵니다.”

당장의 불씨는 꺼진 듯, 호접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나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럼, 연회복은 우선 호접에게 맡기고. 당장 후궁들을 맞이해야 할 문제가 남았군. 나는 손을 들어 켜켜이 쌓인 비단에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을 가리켰다.

“저 세 가지 비단을 꺼내보시오.”

내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궁녀들은 내 명령에 따라 낑낑거리면서 비단들을 꺼내 왔다. 흠, 무늬들이 대충 비슷하네. 역시 내 눈썰미는! 나는 돌돌 말린 비단을 쭉 잡아당겨 길게 늘여 팔에 살짝 걸쳐보았다. 비싼 거라 그런지 걸친 것 자체로도 분위기가 확 바뀐다. 흠,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세 색상을 겹쳐 걸치면 그럭저럭 될 거 같기도 한데? 어차피 발을 쳐두고 맞이할 거라고 들었으니, 밥 먹을 때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고 하면 어떻게 넘어가겠지, 뭐. 

“마마,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이만 납시셔야 하옵니다.”

내가 늦도록 나오지 않자 황제가 내관을 보내 재촉한다. 호접이 입을 여는 것을 저지한 나는 살짝 웃어주면서 잠시 두통이 있어 그러니 일각만 기다려달라고 전하라 했다. 그 순간 굳어지는 호접과 애벌레들이라니. 이거 참, 난 후궁들 안 만난다고 말한 적이 없다구.

“마마, 마땅한 의복이 없사옵니다. 이대로 후궁들을 만나시게 되시면 황후마마의 위엄에 손상이 되옵니다. 통촉하소서.”

“일국의 황후가 아랫것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도 체통이 손상되는 것이오. 지금 내가 꺼내라 한 비단을 겹쳐 걸칠 것이오. 어차피 발을 통하여 보는 것이니 자세히 보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황후로서의 위엄이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오. 아무리 낡은 옷을 입고 있어도 내가 황후로서의 자질이 있다면 본연의 위엄이 드러날 터. 호접은 내가 황후의 위엄이 없다 생각하는가?”

오랜만에 애매모호하면서도 은근히 옳다 여길 만한 긴 연설을 토해내었다. 어떤 옷을 입든 내가 황후로서의 위엄이 드러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세계에서 천녀로의 징표라는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지녔으니, 전신에서 기품이 발하진 않더라도 이 희소성이 짙은 머리칼과 눈만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속기 쉬우니까.

“……소인,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황후마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신 분인 것을요.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호접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음, 쉽게 넘어가는군. 그럼 일각 내 준비하고 가볼까. 오늘은 옷이 너풀너풀 가볍겠구나. 머리 장신구들도 없으니, 목 꺾어질 걱정도 없고. 무거운 옷을 안 입어도 된다는 생각에 흐뭇한 수연이었다. 그러나 수연의 생각과 달리 궁녀들이 수연에게 두두두 달려왔다. 응? 옷도 없는데 왜?

현재 입고 있는 하얀 옷에 수연이 고른 세 가지 색상의 비단을 층층이 겹쳤다. 노란색이 가장 안쪽에, 그리고 푸른 색, 가장 바깥에 붉은 비단으로 겹쳐서 수연에게 숄 두른 듯 걸쳤다. 그리고 뒤에 커다란 꽃 장식들을 달아 등 부분을 화려하게 한 뒤,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 끈을 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뭉치가 부셔놓은 장신구에서 비취구슬을 골라내 실로 연결하여 꽃에 달아 비단 끈들과 함께 찰랑 소리를 내며 뒷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불과 오 분 내에 이뤄진 일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쪽이 무거워 걸친 비단이 홀랑 벗겨질 우려가 있어 작은 꽃들로 장식을 하면서 팔 부분을 옷에 단단히 꿰매고 소매에 닿는 부분에도 등 뒤랑 마찬가지로 비단끈을 길게 늘어뜨렸다. 걸친 비단의 끝자락이 살짝 땅에 쓸릴 정도의 길이라 팔을 앞으로 곱게 모으면 걸친 비단과 꽃들과 비취구슬들 때문에 안에 단순히 하얀 옷 한 벌만 입었다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수연의 긴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이마에 단순한 보석 하나만 붙여주니 그것 또한 단아하고 우아한 멋이 풍겼다.

짧은 순간에 이뤄진 비단의 변신이라. 흐음, 다들 신의 솜씨야. 한두 해 바느질해본 솜씨가 아닌데? 기인열전 나가도 되겠다. 나는 거울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움직일 때마다 뒤에서 비단 끈들이 흔들리는 게 너울너울 예쁘다. 맘에 들어. 호접과 궁녀들도 내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며 다소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마마,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셔야 하옵니다. 급히 손본 것이라 심하게 움직이시오면, 달아둔 장신구들이 와르르 떨어질 것이옵니다. 아시겠사옵니까? 절대 사뿐사뿐 조심히 걸으셔야 하옵니다.”

호접의 진지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후궁들 앞에서 채신없이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옷조차 그러하니 더욱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겠군. 좋게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그럼 다녀오소서. 소인은 아랫것들을 단단히 야단쳐두겠사옵니다.”

엥? 갑자기 인자하던 호접의 표정에 사악한 기운이 서린다. 순간 궁녀들은 얼굴이 허옇게 탈색되어간다.

“호접, 어이하여 궁녀들을 혼낸다 하시오?”

“주인이신 황후마마의 물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이옵니다. 물론 소인도 그 죄를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으음, 인자한 인상과 달리 의외로 엄한 분이군, 호접은. 근본 원인은 뭉치 자식인데, 황후 애완동물이라고 어쩌지도 못하고 엄한 궁녀들만 혼쭐이 나겠군. 그건 안 되지. 죄지은 놈이 혼나야지!

“호접, 그러면 주인인 내가 직접 벌을 내리겠소. 괜찮겠지요?”

내 발언이 뜻밖인지 호접은 살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우선 난장판이 된 내 방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치우시오. 후궁들과 만난 후, 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말이오. 그리고 내 저녁 연회 전까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연회복을 만들어야 하오. 황후로서의 기품이 넘치면서도 내가 연회 내내 편. 안. 하. 게. 입고 있을 수 있는 연회복을 말이오. 이 두 가지가 내가 궁녀들에게 내리는 벌이오.”

편안하게라는 말을 새겨들으라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한마디로 이따 쉬겠다는 말이랑 거추장스런 복장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다. 옷 찢어진 김에 좀 가볍게 입자.

“하오나…….”

내가 내린 벌이 사실 궁녀라면 당연하게 해야 할 본 업무기에, 호접이 반박하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호접은 직. 접. 내가 좋아하는 월병을 만들어주시오. 전에 가희가 만들어주었었는데, 이젠 나를 보살피는 이가 호접이니 꼭! 그대가 만들어주는 월병이 먹고 싶소.”

가희라는 단어에서 움찔한 호접은 내 말이 끝나자 의지에 불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흐음, 대상궁이 월병 만들 동안은 궁녀들이 덜 혼나겠구나 싶어 억지스럽게 맡긴 일인데, 왜 저리 불타누? 월병 만드는 걸 원래 무지 좋아했나? 어쨌든 궁녀들도 좋아하고, 호접도 내가 내린 벌을 받아들이니 이건 이쯤에서 해결되었고, 남은 건 뭉치 자식인데.

“홍류.”

“네, 마마.”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홍류가 내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귀여운 외모의 홍류에게 나는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뭉치 녀석을 잡아서 꽁꽁 묶어서 내 방 침실에 달아줘요. 홍류라면 금방 해줄 수 있죠?”

“물론입니다. 헌데 비단 끈으로 묶을까요? 아님 동아줄로?”

허걱, 내 부탁에 저리 해맑게 웃으며 물어보다니. 혹시 홍류도 뭉치에게 쌓인 게 있었나? 나는 가볍게 쇠사슬로 달아두라고 말한 뒤, 초조해하는 내관을 따라나섰다. 황제가 좀 기다린다고 설마 목을 베겠냐? 왜 이리 안절부절못해? 게다 소매에 장식으로 단 비단 끈이 땅에 끌리면서 거치적거린다. 이거, 빨리 걷고 싶어도 못 걷겠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내관의 뒤를 따랐다.

『흐음, 아직은 팔팔하네.』

수연의 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가 쪽 나무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남청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조그마한 인영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대무녀 후계의 옷을 입은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손에는 곧 쇠사슬에 매어질 뭉치가 있었다. 애처롭게 에메랄드의 눈으로 멀어져가는 자신의 주인을 응시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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