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사실은 머리도 다른 놈들보다 이만큼은 모자란 듯하다. 그래서 네가 좋다. 나와 벗을 하자.”

경상도 지역 유력 가문의 장남들을 불러올리라는 임금의 명. 진주의 변 대감 댁 일희는 병약한 동생 장이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궁궐에 들어갔으나, 첫날부터 세자 찬에게 감 도둑으로 찍혀 옥에 갇히고 만다. 매번 세자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만 하게 되는 가짜 장이!

자꾸 찍히다 정들었나, 세자가 자신의 벗이 되어 달라 손을 내미는데…….

“숨기는 것 있으면 지금 다 말해라.”

“다시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그러니까 지금 다 말해. 다.”

“그럴 것이 없지. 그러하지? 너는 보이는 것이 다인 것이지?”

장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라고 말을 못 한 것은 입 안 가득 도미 살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오직 그 이유로 자기는 사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 그 탓이다. 도미, 탓이다. 다…….’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예요

http://blog.naver.com/merubi

▣ 출간작

변장 도령(전2권)

천일야화(전3권)

▣ 출간 예정작

우드럽미

용왕님의 유혹

3. 차례

# 1. 한양으로 간 변장 도령

# 2. 세자에게 찍힌 변장

# 3. 역모가 남긴 상처

# 4. 벗과 들꽃

# 5. 소고기 산적과 찬 바람

# 6. 도토리와 토끼 사냥

4. 미리 보기

“근데 그 도둑놈 소리 좀 안 하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왜 너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나. 그럼 도둑을 도둑이라 부르지 뭐라 불러.”

“제가 감을 안 먹었습니다요. 잘 생각해보시면 제가 따먹으려던 감은 세자마마 눈두덩으로 떨어졌고 저는 그 자리에서 옥으로 잡혀가지 않았습니까요? 감을 훔쳐 먹으려던 것은 맞는 일이나 미수에 그쳤다 그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감을 훔쳐 먹으려다가 실패한 놈이지, 감을 훔쳐 먹은 놈은 아니란 말입니다…….”

보석 장식장 앞에 장이를 몰아붙여 놓고 찬이 엄중하게 내려다본다.

“그렇게 말하면 좀 위로가 되나?”

“아니요…….”

장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래.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다. 그래도 도둑놈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나. 반성하는 낯빛으로 코를 한번 훌쩍거린다.

“잘못했습니다…….”

풀이 죽은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기특하여 장이 놈의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찬은 일부러 웃음을 감춘다. 허나 억지로 굳게 다문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가는 것은 막지 못하였다.

“그럼 이제 도둑놈이라고는 안 부르겠다.”

“정말요? 정말입니까?”

“한번 뱉은 말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말을 들은 네 것이다.”

“좋습니다요. 그리고 고맙습니다요, 세자마마.”

장이가 꾸벅 절하자 찬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래, 이 세자의 은혜가 하해와 같지 않으냐. 하하. 하하.”

히익. 저럴 때는 꼭 세자가 아니라 유아 같다. 장이는 찬이 몇 번 쓰다듬은 망건을 살짝 고쳐 잡는다. 그만한 손길에 삐뚤어질 리는 없었으나 왠지 망건 속 머리가 간질거렸다. 신경 쓰이지 않게 망건을 제대로 고쳐 쓰고 장이가 찬을 따라 자리에 앉으니 나인들이 조반을 들고 들어왔다. 한 상 가득 걸게 차려진 음식에 배고팠던 장이의 눈이 돌아간다.

“수저를 들어라.”

나인들이 기미라 하는 것을 마치고 나자 찬은 밥을 먹으라고 했다. 장이가 얼른 흰 쌀밥부터 수북이 퍼 입 안에 들이민다. 꽤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으나 찬은 그저 말없이 두었다. 그는 그대로 식사에 집중했다. 옆에서는 온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소란스런 식사를 이어갔으나 오래간만에 쓸쓸하지 않은 조반이었다.

“이거 먹어도 됩니까아?”

답지도 않은 애교를 부리며 장이의 젓가락 끝이 소고기 산적을 가리켰다. 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나서 그걸 집어 먹는다. 그 모습이 꼭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찬은 고기 산적을 장이의 밥그릇에 다 몰아준다.

“나중에 뭐라, 하시기, 우우, 없기…….”

“입 안에 든 밥알이나 제대로 씹고 말하거라. 아주 더럽다.”

“예에, 우우.”

밥알이 덕지덕지 붙은 입술에 아주 볼이 미어져라 씹어대는 모습이 딱,

“이놈! 상거지.”

“…….”

또 욕이다. 기분은 나쁜데 그 와중에 먹을 것은 포기할 수가 없다. 우물우물 소처럼 씹어대는 모습이 장이 제 생각에도 약간, 아주 약간 미련스럽기는 하다.

“세자마마.”

“왜.”

“욕하지 마십시오.”

“도둑놈이라 안 하지 않았느냐.”

“…….”

“약속은 지킨다.”

“…….”

“상거지 이놈.”

아, 진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네. 이건 다 정신적인 공허함 탓이 틀림없다. 진주 변 대감 댁 아기씨로 살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젠 제가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생각도 안 난다. 기억이 아득하다.

‘아름답고 평화롭던 진주 시절이여. 아, 여기 와서 며칠 만에 이리 바뀌어버렸네.’

“상거지라 하지 마십시오…….”

“너 설마 또 울려고 그러느냐?”

“어쩌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냐. 그러고도 네가 사내더냐. 가지가지 그만하라. 나는 찡찡대는 애를 내 곁에 두고 싶지 않다.”

폭포 눈물 한번 준비해보려다가 울보는 싫다 해서 그만두었다. 장이가 도미 산적을 손에 잡고 뜯기 시작한다.

“상거지 놈아.”

“예, 마마.”

관심을 음식으로 돌리니 상거지 소리도 들을 만했다.

“숨기는 것 있으면 지금 다 말해라.”

“우우웅…….”

도미 살이 뼈와 함께 씹힌다. 영 거치적거리는 굵은 뼈 가시가 한 놈 있다. 그래도 장이는 열심히 입을 우물거린다.

“다시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그러니까 지금 다 말해. 다.”

“…….”

세자의 물음은 진지했고 장이는 속내를 숨겨야 했다. 목구멍이 반으로 좁아진 것처럼 탁 막혀온다. 속으로야 가슴이 답답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없지. 그러하지?”

찬은 확신에 차 있었다. 무턱대고 덤비는 행동이 멍청하긴 해도 그 속이 다 보이는 순박한 아이다. 나이 오십을 넘긴 능구렁이 대감들도 아니고 피의 암투를 벌이는 미색 후궁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스물, 자신의 부름에 진주에서 쭐레쭐레 올라온 시골 도령일 뿐 아니냐.

“그렇지? 너는 보이는 것이 다인 것이지?”

장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라고 말을 못 한 것은 입 안 가득 도미 살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오직 그 이유로 자기는 사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 그 탓이다. 도미, 탓이다. 다…….’

“그래, 장아.”

아까처럼 찬이 망건이 쓰인 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간지럽지 않았다. 대신 다른 데가 콕콕 쑤신다.

‘미안합니다. 세자마마.’

그만 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장이는 밥그릇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집어 우걱우걱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