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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흰 가운 속 사정 2권 (완결)

글쟁이소녀 지음로망띠끄2012.11.19979-11-258-3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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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놀려댈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나는 한순간에 그 여자의 웃음도, 눈물도, 모두 가슴에 새겨버리고 말았다.
3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시작된 우연, 그것은 과연 악연일까, 운명일까?
새하얀 가운을 휘두른 그들의 비밀스런 속사정. 보이는 병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함께 치유 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선호는 분명 추운 날씨인데, 주변으로 폴폴 풍기는 연인들의 애정 어린 관심에 슬슬 낯빛이 뜨거워졌다. 그는 민망함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지를 보았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들고서 발을 동동 굴리며 손을 비비고 있는 한 여자. 춥지도 않은지 무릎을 살짝 덮는 빨간 원피스에 제법 신경을 쓴 것 같은 긴 머리카락이 굽실거리며 내려와 있었다.
선호는 다 피운 담배를 문지르며 연신 그 여자를 주시했다. 상당히 오래 기다린 듯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굉장히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래도 춥긴 추운지 연신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남자 기다리나? 아님 데이트? 그것도 아니면, 첫 고백?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기다리는 일 인 건 분명한 것 같았다. 표정에 정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아주 행복해 죽겠다는 웃음. 제법 예쁜…….
‘하, 최선호. 미쳤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연락조차 안 되는 이 자식들을 어떻게 족쳐 줘야 하나,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어 올린 순간, 액정 위로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와, 눈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주변의 커플들이 꺄아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말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선호는 손바닥 위로 스르르 녹아내리는 이 차가운 눈송이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그 빨간 원피스의 여자를 떠올렸다. 만약 정말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면, 이 정도 무대가 만들어졌으니 엄청 기뻐하겠네. 여자들은 이상하게 그런 거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니까.
그는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아주 조심스럽게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선호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점점 새하얗게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트리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에 시간이 점점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선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같이 웃고 싶어졌다. 저 여자가 품고 있는 저 행복함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 손끝으로 아릿하게 번지는 열기가 점점 얼굴 위로 스치며 눈빛으로 설렘이 배어들었다. 그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선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그의 휴대폰엔 그 이름 모를 여자가 새하얀 눈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치겠네.”
군 입대를 앞두고 허해진 마음에 모든 여자가 예뻐 보이는 건가? 아님 정말 첫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거야? 돌겠군. 그래, 그럼 뭐. 이름이라도…….
그때 타이밍 좋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까는 죽어도 연락이 없더만 참 눈치 더럽게 없게 연락하고 있는 원수 같은 동기들.
선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멈춰 들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안타까운 눈빛이 그 여자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왜냐면, 그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던 그 여자가. 울고 있었으니까.
선호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앞뒤 생각 안 하고 그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이미 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선호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멍한 시선으로 그 여자가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그 여자의 조그만 발자국이 움푹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서서히 눈이 덮이고 있었다. 마치 그 여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묻어 버리는 것처럼.
그해 겨울의 크리스마스. 항상 평범하디평범했고, 별다른 의미도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한순간에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버렸다.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놀려댈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나는 한순간에 그 여자의 웃음도, 눈물도, 모두 가슴에 새겨 버리고 말았다.

<미리보기>

선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하리를 보면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들었다.
“일단 인턴 선생이 해줄 일은 간단해요. 자료 정리 도와주고, 데이터 분석해 주고, 할 수 있으면 도표로 깔끔하게 해주면 더더욱 좋고.”
그러면서 건네는 분량은 아주 어마어마했다. 조하리. 오늘부터 밤샘이구나. 아무리 인턴이 일을 먹고살 정도로 일만 한다지만, 유독 나는 일이 흐르다 못해 넘쳐 터질 것 같았다.
“급하니까, 내일 모레까지. 할 수 있죠?”
“네, 선생님.”
내일 모레? 그래, 날 죽여라. 잡아 죽여!
하지만 힘없는 인턴은 그저 눈물을 머금고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어마어마한 분량을 움켜쥘 뿐이었다. 눈빛에서 절로 흐르는 한숨. 선호는 이 조그만 병아리가 덜덜덜 떠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고 재미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나, 사디스트였던 건가?
“그럼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한시라도 빨리 이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미친 듯이 달린다면, 아주 조금의 아침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어서 고개를 끄덕여 이 못된 변태 자식아. 나도 내 위장에 음식이라는 걸 좀 넣어 보자고!
하지만 그러한 하리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선호는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씨익 그리며 여유를 떨었다.
“흠, 인턴 선생 지금 엄청 배고프구나?”
“네?”
“나 배고파 죽겠어, 얼른 가라고 해 이 변태 자식아.”
“…….”
“그렇게 얼굴에 쓰여 있네.”
헉, 설마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난 건가? 하여튼 귀신같은 놈!
“아닙니다. 변태라니, 그런 생각한 적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고 절대 배도 고프지 않…….”
하지만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 채, 하리의 위장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결국 쪽팔림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고, 선호는 서류 뭉치를 끌어안고 발개진 얼굴을 감출 길 없어 동동거리는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아, 정말 툭 건들면 온몸으로 반응을 보여주니 건드리는 재미가 있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햇병아리가 다 있을까!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그녀를 향해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됐어, 인턴도 사람인데. 그리고 나랑 인턴 선생의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잖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줘야지. 그렇지만 절대 남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얼굴에 다 티 나니까.”
“……네.”
“우유 먹을래? 원래 식욕이 성욕을 못 이긴다잖아.”
어디선가 우유를 하나 꺼내 주는 그의 말에 하리는 마지못해 우유를 받아들고선 팩을 열었다. 아무튼 비유를 해도 그런 거랑 비유를 하냐? 역시 변태는 변태였다. 하긴, 그것도 인간의 삶의 욕구 중 하나인데. 내 주변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런 것을. 그런데 정말, 그 섹스……라는 게 그렇게 좋은 걸까? 매일 날밤을 새우는 순간에도 잊지 못할 만큼?
하리는 항상 진이에게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기에 아직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맛있어?”
우유 먹는 모습 처음 보는지, 아주 턱까지 괴고서 구경을 하는 통에 먹다가 사레가 걸릴 것 같았지만, 확실히 그녀의 몸은 본능에 너무나도 충실한 탓에 넘어가는 우유가 정말이지 꿀맛 같았다.
“네, 맛있어요.”
“흠, 그래. 근데 그거 언제 적 우유인지 몰라. 내가 여기 처음 들어오니까 있더라고.”
“…….”
“근데 여기 좀 비어 둔 지 오래된 거 알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다 옵션으로 방긋방긋 웃어 주며 말하는 저 자식의 면상에 이 우유를 쏟아 붓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이를 악물고 억눌렀는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정말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됐을까?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 달! 성격이 정말 삐뚤어지다 못해 까맣게 아주 까맣게 타버린 게 분명해! 개 사이코 자식!
하지만 하리는 우유를 오히려 단번에 다 마시고 보란 듯이 그의 앞에 턱하니 내려놓았다.
“뭐, 죽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사방에 널린 게 의사인데, 까짓것 아프면 누군가 이 불쌍한 인턴 한 명 구해 주겠죠.”
“하긴. 그럼 내 잘못도 있는 거니까 내가 친히 우리 인턴 배를 예쁘게 갈라 줄게.”
“네,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누가 보면 아주 사이가 좋아 하하 호호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가던 찰나, 갑자기 복도가 쿵쿵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도 낯이 좀 익은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로 신경외과 3년 차 치프 남태종 선생님이었다.
“왜 이렇게 뛰어오냐? 내가 그렇게 보고 싶디?”
무척이나 친근하게 말을 섞는 선호의 모습에 하리는 서로 아는 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태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선호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선 아까와는 달리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부르냐?”
“1번 수술방에서 콜 왔습니다.”
“거기서 뭐 하는데?”
하지만 태종은 차마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러자 선호는 굳어진 입가로 얼핏 미소를 스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머리 열고 있구나?”
“부원장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우리 부원장님은 어쩜 이렇게 쇼를 좋아하시는지.”
잔뜩 일그러진 태종과는 달리 그는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본 하리는 처음으로 그가 지쳐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까까지만 해도 개 사이코처럼 방방 대던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고 있는 걸까.
“최선호.”
결국, 참다못한 태종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선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태종은 옆에 하리가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역성을 내었다.
“그래, 됐다, 됐어. 내가 네 속을 어떻게 알겠냐? 하지만 괜히 너희 집안싸움에 내 등 터지게 하지 마라.”
집안싸움이라는 말에 선호는 뭔가 짐작하는 구석을 떠올리고선 입가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꽤나 살벌한 빛을 띠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인턴 선생.”
“네, 네?”
찍소리도 안 하고 서 있던 하리는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다시금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 선호는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나 덕분에 좋은 구경하게 될 줄 알아. 이런 수술, 인턴이 보는 건 힘드니까.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설마, 나도 간다는 거야? 하지만 그 설마가 농은 아니었는지, 선호는 하리의 손을 잡고서 성큼성큼 신경외과 쪽 수술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점점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차마 이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의 단단하게 다물어진 표정을 보니 쉽게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뭔가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도대체 내과 전임의가 신경외과 수술에 불려가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부원장님이라니, 그건 거짓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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