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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합본] 왕과 정령 [전9권]

해난 지음라떼북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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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난



언제나 생각만 많아 행동에 옮길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성격.

신화나 전설,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며

관심이 가는 것은 몇 번이고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매번 '정말 이래도 좋았는지' 고민하지만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단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노력 중.

실패에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실패를 밑거름 삼아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다음에는 더 나아져야지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글을 쓰고 있다.





목차



서장(序章)

1. 책과 꿈속의 수인(囚人)

2. 달의 마신과 성스러운 도시

3. 세계의 전승과 신기루의 왕좌

4. 마술 결사와 뱀

5. 축제의 밤과 주박의 주문

6. 동쪽의 태양과 백악의 장미

7. 저무는 별과 어둠 속을 방황하는 자들(1)

7. 저무는 별과 어둠 속을 방황하는 자들(2)

8. 옛 언약과 왕의 잔을 흐르는 피

9. 황금의 과거와 꿈의 종막

10. 월식의 마신과 회귀하는 세계

終章. 왕과 정령





서장(序章)





어렸을 때부터 모험소설이나 역사소설 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언제나 뭔가를 상상하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자신은 어른들의 평가에 의하면 옛날부터 반응이 두세 템포 느린 아이였던 것 같다. 친구들이 말하길 마구 놀라거나 동요하고 있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일 때가 많아서 이 녀석은 거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나. 남 말은 할 수 없지만 참 실례인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지현은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어둡고 추운 사각의 방.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낡은 석조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어슴푸레하게나마 빛이 있어 조금은 시야가 트여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별 위안은 되지 않았다. 벽면이 고르지 않은 석벽의 음영을 짙게 만드는 효과 덕분에 더 음산해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아까부터 냉기가 몸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지현은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살짝 몸을 떨었다. 입고 있는 것은 파자마다. 이전 친구들과 함께 산 병아리색의 잠옷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떻게 봐 줘도 붕 떠 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늘 하던 대로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강하게 졸음이 쏟아졌고, 잠시만 눈을 붙이자고 생각해 엎드린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 자신은 이런 곳에 있는가. 지현은 고민스러웠다. 혹시 이게 꿈이라면 어쩌나 싶었다. 꿈은 사람의 소망을 반영한다는 설이 있다고 들었다. 소녀는 그런 토막지식을 생각해내면서 이 삭막하고 절망적인 공기를 드리운 공간의 안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어, 아가씨……. 혹시 너는 마신(魔神)인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깊이가 있어 잘 울리는 목소리였다. 밝고 힘 있는 어조는 주인의 쾌활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목소리만 듣자면 솔직히 굉장히 멋진 소리라고 생각한다. 내용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않으면.

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살풍경한 방의 구석에는 선객이 있었다. 그를 이곳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눈에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천장에서부터 이어지는 굵은 쇠사슬로 양 손을 결박당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어둠이 짙어서 확연히 보이지는 않아도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얼마나 긴 시간 구속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산발이 된 머리와 무성하게 자란 수염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 산적 같은 풍모는 확실히 다가가고 싶어지는 모습은 절대 아니었지만 지현이 지금 뒤로 물러선 이유는 좀 다른 데에 있었다. 그 남자의 복부에 이상한 형태의 단검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데이션이라고 하면 어색하지만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색이 표면에 일렁이고 있는 단검이었다. 실제로는 단검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다. 손잡이가 없는 날붙이는 대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게다가 아라비아 문자 같은 문양이 금속의 겉을 기어 다니고 있다. 신비하고 말고를 따지기 이전에 징그럽다.

어째서인지 본능적으로 그 날붙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해버린 탓에 지현은 다시 한 발짝 몸이 물러서려는 것을 간신히 견뎠다. 확실히 공부는 싫지만 이런 꿈은 더더욱 싫다. 지현은 약간 숨을 들이마신 뒤에 억지로 그 단검에서 시선을 떼어 남자를 보았다.

“마신……. 으로 보이나요? 저.”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당신 쪽이 더 마신으로 보인다는 감상을 담아 일단 대답해보았다. 저런 검이 배에 꽂혀 있는데 피조차 흐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뜻밖에 상대는 그 대답이 재미있었는지 웃는 것 같았다. 그의 팔을 매달아 올리고 있는 쇠사슬이 쩔그렁 소리를 냈다.

“그렇게 보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해야겠지. 출구도 입구도 없는 이 석실에 갑자기 솟아나온 비무장의 어린 아가씨가 아닌가. 그야말로 전승에서나 들을법한 마신과 마주친 건 아닌지 의심해보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말이야. 아니면, 마침내 내가 환각을 보는 단계에 이르렀는지도…….”

즐거워하는 어조로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끄트머리에 이르러 한숨을 섞는 것을 들으며 지현은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환각?

“환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뭔가 그런 질환을 앓고 있다는 건가요?”

“아, 아니, 아니.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대화해본 게 대체 언제 적 일이었는지 슬슬 위험해지려고 하던 참이라서. 보시다시피 이런 꼴로 변변한 조명도 없는 이곳에 혼자 앉아있는 처지라서 말이야. 말하는 법도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술술 잘 나오는군. 고마워, 아가씨.”

“천만에요……. 어? 감사 들을 일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야말로 천만에. 지금의 나로서는 이야기 상대만으로도 감지덕지야. 이런 볼썽사나운 몰골이라 안타깝지만.”

그의 말대로 남자의 외양은 확실히 참담한 꼴이었다. 고문이라도 받았는지 상처 자국과 굳은 피로 해진 의복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긴 시간 방치된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은 이곳에 갇힌 죄수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꿈이라고 생각해 지현은 과감하게 물어보았다.

“저기, 실례지만 혹시 갇혀 계신 건가요?”

“응? 맞아. 아가씨도 지위 있는 마신이라면 이 감옥에 쳐놓은 저주가 어떤 건지는 알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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