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위해 끊어낸 사랑.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었다.
‘진짜는 안 해. 그런 척만 한 거야. 그런 척. 사랑하는 척…….’
‘당신,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인 줄 알았어요.’
생애 처음으로 희망을 걸었던 사랑. 그녀의 세상이 무너진다.

여자는 영원을 원했으나 닫힌 가슴의 남자는 처음부터 한계를 정했다.
‘여기까지만. 너랑은 여기까지만이야. 더는 안 해.’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한 순간 남자는 다시 여자가 갖고 싶어진다. 어차피 버리려했던 것이니 다시 갖고 싶어진 지금, 방법은 간단하지 않은가!
남자의 착각이다. 그녀는 이미 닿을 수 없게 멀어져 있다.


<본문 중에서>

남자의 손이 소녀의 목덜미를 훑고 등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넌 참 순진하구나? 내가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니?”
“…….”

그제야 소녀는 흠칫 놀라 몸서리를 쳤다. 이 잘생긴 청년이 조금 전 저를 겁탈하려던 더러운 패거리들과 같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동공이 경악으로 열렸고 얼굴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저런, 진짜 흑기사라도 만났던 얼굴이네? 크크, 어쩌나? 환상이 깨져버려서. 세상 무서운 걸 알아야지, 공주님. 자! 어떻게 놀아줄까?”
“흑, 놔요. 놔 주세요. 놔! 아악!”

경계심 많은 토끼처럼 겁쟁이에 나약한 줄로만 알았던 소녀가 갑자기 그의 품에서 발버둥질하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눈물범벅이 된, 상처투성이 얼굴을 하고도 앙칼지게 비명을 질러대는 소녀를 대하자 남자는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덫에 걸려 무섭게 독이 오른 야생동물이 연상되었다. 극단의 몸부림엔 사고가 들어있지 않았고, 당장 놓아주지 않으면 자해라도 할 모양 흥분이 격해 그를 소스라치게 했다.

칼 든 강도에게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달려드는 격이었다. 아니면 이 순간 진짜 살고 싶지 않거나.
남자는 일순 멍해져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소녀는 팔을 휘저으며 남자를 밀쳐버리고 사자(使者)에게서 도망치는 양 무작정 도로로 뛰어 들어갔다.

“안 돼! 위험해!”

소녀가 자동차 쌩쌩 달리는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자는 가슴이 철렁해 위험천만한 행각을 벌이고 있는 소녀를 뒤쫓아 뛰었다. 늦은 시각이라 차들이 뜸하긴 했지만 한적한 도로는 무법질주를 방조해 자칫 큰 사고가 야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혼이 나간 것처럼 앞만 보고 나아가는 소녀 곁으로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경적을 울려댔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하지만 소녀는 움찔하지도 않고 길을 횡단해버렸고, 남자는 그제야 중앙선에 멈춰 서 저만치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해하려한 건 자신이었는데 나가떨어진 것 또한 자신이었던 듯 그는 속절없이 무력해져 도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로소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성이 깨달아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살인이라도 행한 모양 이 순간 스스로가 무시무시하게 여겨져 두렵고 소름이 끼쳤다.
어둠 속에서 회한, 분노,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와 스물두 살짜리 남자를 덮쳐누르고 있었다.

<작가프로필>

필명 서풍.

2000년부터 온라인에서 작품 연재를 시작했다.
작품으로 <격정 속으로> <사천> <시간의 얼굴> <스완> <그녀를 위하여> <야만의 계절> <애증의 시간> <내가 기다린 사랑> 등 다수의 종이책과 전자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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