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살아서 이 작은 천국을 얻고자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을 선택했다.”

아일 에드가 클레이모어.

그리고 그의 기억을 가진 남자, 서정현.

“만약에 아니라면요……. 제가 그녀가 아니라도 이렇게 잘해주실 건가요?”

라야 윈터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하듯 천칙(天則)에 의해 기억을 묻어버린 여자, 한지은.

지은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영리하고 자신만만한 시선을 온전히 받았다. 하지만 입가는 조금 굳어 있었다. 지은이 물었다.

“노력을 해도 보답받지 못하면요?”

“보답?”

“좋아하는 사람한테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쪽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면요?”

전생의 기억과

현세의 추억이 교차하는 곳,

나달의 언덕.

2. 작가 소개

아드소

여름에 태어났지만 더위에 약합니다. 여름밤은 좋아합니다.

제가 활자로 옮긴 인물과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도 잠깐의 재미, 또는 오랜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차례

#15

#16

#17

part. 4

#상담

#18

#19

#20

#21

part. 5

#악몽

#22

#23

#24

#25

#26

4. 미리 보기

블라인드를 내린 사장실은 조금 어둑했다. 덕분에 지은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작성하다 말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정현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지은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은이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와 책상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정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없이 그녀의 행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자세는 서류에 서명을 하던 그대로 딱 멈춘 채.

지은은 빈 쟁반을 가슴에 붙이고 서서, 블라인드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하얀 햇빛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정현이 서명을 마저 끝마치고 혀를 짧게 차며 펜을 탁 내려놓았다.

“이쯤하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어색하게 왜 이래요?’ 이렇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정현이 지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빙글거렸다.

지은은 블라인드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보았다. 정현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다시 심경이 복잡해졌다.

정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맞잡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지은의 첫마디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초조해진 그가 의자를 굴려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물어야 되는 건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벌써 사고 친 거야? 첫날부터? 내가 커버 가능한 일이야?”

“……벌써 사고라뇨. 제가 사고 칠 게 예상된 일이란 거예요?”

지은이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정현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찍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발끈해야 지은 씨답지. 조언을 하자면, 지은 씨 본래 모습이 사회생활 하는 데는 훨씬 잘 먹혀.”

지은이 입을 삐죽대자 정현은 키들거리고 웃었다. 그는 다시 발을 굴러 의자를 뒤로 물렸다.

“어때, 사람들은 괜찮은 거 같아?”

“첫날인데요, 뭐. 예, 좋은 사람들 같아요.”

“혹시 무슨 문제 있으면 장 실장한테 얘기해.”

“예. 좋은 분 같아 보였어요.”

“좋은 녀석이지. 아, 우리 회사 머핀 먹어봤나?”

“아니요. 사무실에 가져오기는 했는데, 아까 인사한다고 끌려오는 바람에 아직…….”

정현은 그녀의 말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인사하러 왔을 땐 왜 멍하니 있었던 거야? 내가 인사를 해도 가만히 있고, 장 실장이 악수를 청해도 악수만 덜렁 받고 넋 놓고 있고. 수영 씨가 당황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덕분에 재밌었어.”

그가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쿡쿡 웃었다.

지은은 그를 보며 아까 꿨던 꿈을 기억해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한 남자의 이름.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리는 오 분간 낮잠 속 이야기는 저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에 대한 기억을 깨끗이 소거한 뒤였다.

컴퓨터라면 삭제 파일을 되돌려 보는 법이라도 찾아볼 텐데 이것은 불행히도 인간의 뇌였다.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은은 지금 코끝에 감도는 커피 향만큼이나 아주 어렴풋이 남아 있는 한 가지 인상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꿈속의 남자는 무뚝뚝하고, 조금은 무섭고,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지금 정현의 모습과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었다. 꿈의 흔적은 그게 전부였다.

커피 잔이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지은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머핀 하니까 생각난 건데,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단 거 알아요? 머핀 같은 거 많이 먹여서 점심 못 먹게 하고 그 시간에 일을 하게 하려는 거 아니냐는.”

“아, 그거? 나랑 장 실장이 낸 소문이야.”

“……예?”

“비상구 계단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사람들이 나오잖아. 평사원인 척하고 슬쩍 얘기를 흘렸지.”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재밌잖아.”

정현은 소년처럼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오늘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정장이 잘 어울렸다. 지은은 지난주 시골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그는 평상복 차림도 잘 어울린다. 오히려 지은은 그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혹시나, 자신만 아는 정현의 모습이란 점 때문에 그런 건지, 이른바 독점욕 때문인지 지은은 잠시 고민했다.

벌써 그날의 일이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또다. 또 이런 기분이야. 그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바로 어제의 일이라도 기억이 빠른 물살에 휩쓸려 가버린 듯 금세 먼 일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그때의 장면들은 희미해지고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더 선명해졌다. 마치 그가 선물한 향수 향처럼.

“점심은 누구랑 먹을 거야?”

정현이 물었다. 지은은 오늘의 그에게서 그저께의 그를 떠올리느라 흐릿해져버린 시선을 얼른 수습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요, 점심은 비서실 사람들과 먹어야 되지 않을까요?”

“난 점심시간부터 밖에 나가 있는데. 그리고 바로 퇴근할 거야.”

“바쁘네요. 저녁은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 왜, 나와 함께 하고 싶어?”

“그 눈빛을 보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지겠어요. 모레 저녁은요?”

“그날도 선약이 있지.”

“정말 바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 자리 같은 거 안 맡는 건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욕해요.”

“욕하라고 그래.”

지은은 빈정대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욕먹는 게 무섭지 않은가 봐요. 학생일 때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죠. 남들이 자기를 싫어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태연한 애들. 남다른 재주가 있는 아웃사이더들이 잘 그랬죠. 진짜 남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정현은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지은은 그의 긴 손가락 사이에서 놀아나는 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현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펜 끝으로 책상을 콕 찍으며 말했다.

“모두에게서 어떻게 다 사랑을 받아.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건방진 거야. 난 모두에게서 사랑받을 자신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날 욕하지 않으면 돼.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뱉어내는 데 막힘이 없다. 평소 그의 행동처럼.

지은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영리하고 자신만만한 시선을 온전히 받았다. 하지만 입가는 조금 굳어 있었다. 지은이 물었다.

“노력을 해도 보답받지 못하면요?”

“보답?”

“좋아하는 사람한테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쪽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면요?”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블라인드가 살짝 들려 올라갔다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얼굴 위로 햇빛이 드리웠다 그늘이 졌다. 그 때문인지 지은의 표정은 한층 가라앉아 보였다.

“할 수 없는 거지. 자기가 좋아서 한 거잖아. 좋아서 해놓고 뭘 더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난 그의 마음을 묻고 싶은 거였나, 아니면 나에 대한 조언을 구한 거였나? 그는 어떤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나는 자꾸 이런 짓궂은 질문을 하는 거지?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걸까?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길 원해?

그는 이미 가치관이 완성된 사람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그는 아마 남들이 풋사랑에 고민하고 수험 생활에 지쳐 할 동안 감히 여느 또래가 짐작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고통은 그것을 이겨낸 사람을 성숙케 한다. 그것은 진리에 가까웠다. 그는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었다.

그는 나처럼 흔들리지 않아. 그래서, 이토록 곧장, 내게, 또한 그녀에게 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는 정말 추호의 의심도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