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소개 : 사유림. 思流林, 생각이 흐르는 숲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목 : My All

등장인물 :

윤지안(18~27)
무표정, 무관심, 냉소적이고 무심한 성격. 어린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불행에 지쳐 있다.
“불행의 트라우마에 갇혀 주저앉은 아이, 그래도 괜찮아?”

강해준(18~27)
상처 때문에 비뚤어진 아이. 아홉 살에서 자라지 못한 그가 지안을 만나 성장을 시작한다.
“괜찮아, 내가 일으켜 세워 주면 되니까.”

윤지후(16~25) 빛이 어둠을 가리고 있는 아이.
“시간은 의미 없어. 존재만이 중요할 뿐…… 내 옆에 있지 않으면 용서해 주지 않아.”


열여덟 살에 만난 소녀가 전부가 되어버린 소년과 십년에 걸친 소년의 사랑으로 인형에서 사람이 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고유명사와 상황설정은 소설일 뿐이고 소설은 허구일 뿐이니 의미를 부여하지 마시고 읽어 주세요. 상처가 많은 두 아이의 성장소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본문발췌글

또다시 날이 밝았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도 어김없이 돌아온 1월 3일이다.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마음으로 눈을 뜬다. 그리고 몇 분간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난다. 한동안 괜찮더니 또 쓸데없는 꿈을 꾸고 말았다. 역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마인드컨트롤에 애를 써도 그 시기가 되면 에고(ego,자아)보다 이드(id,무의식)가 먼저 알아채는 것 같다. 게다가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꿈의 여운이 길게 남았는지 이불을 정리하는 중에 눈에서 무언가가 한 방울 툭 떨어지기까지 한다. 깜짝 놀라 손을 멈추고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 눈에서 또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혹시라도 다시 물방울이 모일까 두려운 사람처럼 서둘러 양손으로 눈을 비비고 화장실로 사라지는 지안이다.
토요일이라 오전회의가 없는 덕분에 평소보다 30분 늦은 9시까지 출근하면 된다. 다른 때에는 한결 여유로운 기분으로 느긋하게 출근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하다. 자꾸 시계를 쳐다봐도 초침은 일초씩 규칙적인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왜 점점 안절부절 못한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작게 한숨을 쉬며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와 연립 입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젯밤부터 많은 눈이 내린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기상청의 오보였는지 길이 깨끗하기만 하다. 낭만적인 눈길보다는 편한 출근길이 더 반가운 메마른 직장인이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이어가는데 문득 귓가에 그리운 음성이 들어와 박힌다.
“지안아!”
잠에서 깬 지가 언젠데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탓하며 멈칫한 몸을 움직이려는데 또 한 번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이다.
“윤지안!”
이건 환청이 아니다. 분명 지금 여기서 들리는 소리이다. 그녀의 등 뒤에서 부르는 그의 음성이다.
귓바퀴가 모아 전해준 것을 대뇌가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녀에게 전달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쉽사리 돌아보지 못하는 지안이다. 돌아봤을 때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것이 아닐 경우 실망스러움이 클까봐 그러는 건지 지안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목소리의 주인공이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가방을 쥔 지안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또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지안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다. 이윽고 바로 등 뒤에까지 다가와 멈춰선 그가 세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지안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가 맞든 아니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마침내 지안이 몸을 돌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서서히 올려다보았다. 블랙 캐시미어 코트 깃이 보이고, 진회색 폴로넥티셔츠에 감싸인 목이 보이고, 단정한 턱을 지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예쁜 입술, 다음으로 한가운데에 곧게 뻗은 콧날과 잘생긴 이마를 덮고 있는 결 좋은 흑갈색의 머리카락이 파노라마처럼 지안의 눈동자에 펼쳐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 쌍꺼풀이 얇게 자리 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냥 보면 날카롭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매지만 웃고 있는 덕분에 눈꼬리가 쳐져 있어 소년처럼 귀여운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그 중앙에 자리 잡은 검은 동체는 올곧게 한 사람만을 담은 채 타오르고 있다.
“우리 지안이 눈,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구나……. 다행이다.”
얼음처럼 굳어져버린 지안의 얼굴을 따뜻한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감싼다. 순간 불이 켜지듯 정신이 번쩍 든 지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을 친다. 멋쩍어진 오른손을 잠시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은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잘 지냈어?”
“…….”
“나는…… 잘 못 지냈어.”
지난 8년 동안 이런 날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처음 얼마 동안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바라고 기다리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체념하는 마음’과 ‘기다리는 마음’이 누가 누가 이기나 내기를 하듯 매일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가 어느 순간 한쪽 마음이 다른 쪽 마음을 완전히 따돌려 버렸다. 엇비슷하게 자라가던 것이 균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덮어버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의 원인인 그가 예고도 없이 눈앞에 나타나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한 마음의 주인이다. 아주 예전에 상상했을 때에는 미안하다고 펑펑 눈물을 쏟거나 아니면 화를 내며 때려 주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침에 무심코 미리 떨어졌던 두 방울 때문인지 볼썽사납게 눈물이 뚝뚝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는 지안의 눈이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건조하기만 하다.
“돌아왔어.”
“…….”
“가장 소중한 걸 찾으러…….”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아니라면 아마 모두들 마네킹이 서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지안이 한참 만에서야 겨우 입술을 움직인다.
“……가장 소중한 게…… 뭔데?”
정초가 막 지난 추운 겨울 아침에 십여 분을 넘게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해서 그런지 입이 금세 얼어 버렸다. 몸 안은 폭발을 앞둔 화산 속처럼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데 이에 상관없이 몸 밖은 날씨에 충실하게 반응한다. 얼어버린 입 때문에 작게 흘러나온 지안의 목소리이지만, 1미터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해준의 귀에는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해준이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지안의 차가운 뺨을 감싼다. 따뜻한 손바닥의 체온이 얼어붙은 뺨에 닿자 지안이 움찔했지만 아까처럼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아니, 곧바로 가까이 다가온 해준의 얼굴에 놀라 물러설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러자 지안의 바로 앞까지 얼굴을 기울인 해준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속삭여 주었다.
“My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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