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뒤.
너 없이도 잘산다고 보란 듯이 웃고, 더 쾌활하고, 더 천진난만해진 제이.
사랑이란 이기적이고 간사한 감정이라고 멸시하는 그에게로, 어느 날 비를 뒤집어쓴 여자가 들이닥친다.
어쩐지 눈길이 간다. 서툰 동정심이 인다. 텅 빈 눈빛이 쓸쓸하고 퍼석해서 못 본 체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다.
까짓 거, 누군가의 ‘쓰임’이 되어보기로 해본다. 가끔은 누군가의 ‘구원’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어차피 갈 데 없고, 심심하고, 무료하고, 쓰일 곳 없는 몸뚱이니까.
“나한테 반하면 안돼요.”
덥석, 가여운 어깨를 쥐고 만다.

이별 뒤.
이별로부터 떨어져나간 날짜를 세며, 엄습하는 이별의 후유증에서 허우적거리는 우희.
‘사랑’이 힘껏 종을 내리친 순간이라면 ‘이별’은 징, 하고 오래도록 울리는 종의 여운이다.
높고 좁은 종탑에 무기력하게 갇혀있던 그녀에게로 누군가 불쑥 손을 내밀어 온다.
위험하진 않을까. 밀어내야 할까. 이러다 자칫, 또 실수로 종을 울리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섭고 두렵지만 이별을 견디는 이 순간, 죽어도 혼자이고 싶진 않다.
“너 같은 어린앨 누가.”
덥석, 내민 손을 잡고 만다.

-본문 중에서-

“어…… 놀래라.”
놀란 건 저도 마찬가지다. 생각지 못했던 방문자에 우희도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말이 없다.
“잘 것 같아서…… 깨울까 봐 살금살금 두드렸는데. 혹시 자다 깼어요?”
우희 앞의 멋쩍은 얼굴이 웃는다. 그제야 아, 하는 낮은 탄성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그 제스처의 의미를 눈치챈 제이가 우희보다 먼저 목소리를 낸다.
“좀 매너 없는 시간이긴 해. 그죠?”
포록포록, 정신 없이 머리를 긁어 댄다. 그리고는 우희의 허락도 없이 전처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현관문을 구렁이 담 넘듯 넘어 들려는 거다.
“어어…… 잠깐.”
정신이 든 우희가 현관 타일 바닥 위에 침범한 제이의 한쪽 어깨를 막아 세운다. 잠깐, 이라 말하며 세워 놓고는 그다음 말을 잇지 못해 입만 벌리고 제이를 올려다본다. 웃고 있던 눈매는 어느 틈에 석고처럼 굳어 버렸다.
“그 눈은…… 경계하는 눈빛인데.”
그대로 말하게 두면 다시 낯선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한 제이의 강의를 들을 것만 같아 우희가 얼른 제이의 어깨를 현관 밖으로 떠민다.
“뭐…… 놀러 오는 건 좋은데…… 이렇게 늦은 밤에 자꾸 이러는 거 곤란해.”
나는 혼자 사는 미혼 여성이고. 잠은 안 오지만 그래도 12시고. 주절주절 읊는 우희는 내쫓는 말과는 달리 냉정하게 현관문을 닫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제이의 앞만 가로막고 서 있다.
“누나.”
중얼거림을 붙잡고 낙하했던 시선이 슬금슬금 들려져 제이의 얼굴로 향한다.
“혹시 나랑 엮이기 싫어요?”
진지한 눈빛이다. 진심을 바라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려 세차게 고개를 흔들게 된다.
“아니. 그런 건 아니구…….”
“누나, 내가 여기 오는 건요. 누나가 맞아 주는 게 좋아서 그래요. 정에 굶주렸거든요. 흑심 같은 거 절대 없어요, 나는.”
정말이라는 듯, 두 손을 활짝 펴 보인다. 흑심 가진 사람들이 흑심을 손바닥 안에 담고 다니는 건 아닌데, 저렇게 해서 증명이 되기도 하나 보다. 그래도 우희가 우물쭈물 대답을 내어놓기를 주저하자, 제이의 눈썹 끝이 내려앉으며 울상이 된다.
“누나…… 나 너무 추워요. 배도 고프고…….”
비어 있는 손바닥으로 이제는 불쌍하게 어깨를 감싼다. 아직 가을이 머리를 들이밀었을 뿐이다. 분명 저건 헐리우드 액션이라는 게 뻔한데도 말려들고 만다.
“미안해……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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