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다 씻었어?”
“이 집 은근히 수압이 낮네.”
“그러게 말이야. 이층이라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물이 좀 시원찮게 나오지?”
“사람 불러서 고칠까?”
삶 속으로 스며든 차 봉익이란 남자의 존재가 더없이 크게 느껴진, 주란이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수도 얘기 하다 말고 왜 웃어?”
“아니야, 아무 것도. 차 한 잔 마실래?”
“내가 준비할게, 씻고 나와.”
“그럴까, 그럼.”
결혼 전까진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막상 그를 집안에 두고 씻으려니 첫날밤을 기대하는 여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물기가 묻은 티셔츠 위로 불거진 그의 가슴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뭐 해, 안 씻고?”
“어?”
“어라, 발가락 봐라.”
스멀거리는 묘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주란이 민망한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서려던 봉익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향해 유쾌한 웃어댔다.
“하하하.”
“민망하게 왜 그래?”
“하하…… 그런 식으로 도발해 놓고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셋 셀 동안 빨리 욕실로 들어가. 아니면…… 하나, 둘…….”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봉익의 말에 얼굴을 붉힌 주란이 뒤도 보지 않고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내 유쾌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뒤를 좇았다.
“하하하.”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젖힌 봉익이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생수 병을 꺼냈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인 그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욕실을 힐끔 바라 본 뒤, 이내 커피를 끓일 물을 가스렌지 위에 올렸다.
그녀만큼 진실 되게 살지는 못했지만, 막상 한 여자를 사랑하고 난 뒤에 바라본 지난 세월은, 봉익 자신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난봉질을 하듯 삶을 유희한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여자들과 더불어 기억에도 없는 짤막한 밤을 보낸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어느 순간 생각할 거리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저 후회라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막막함과 민망함.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하고 싶은 마음이, 매 순간 주란을 안고 싶은 그의 마음을 내리누르게 만들었다.
결혼 전까지 그녀를 안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봉익에게 있어 스스로를 참회할 시간을 갖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작은 몸짓에 그만 무너져 내릴 뻔한 다짐이기는 하지만, 봉익은 스스로를 향한 약속을 지켜내고 싶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주란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을 어지럽히자, 생각을 털어내듯 봉익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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