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혁
서울 고등법원 강력계 부부장검사. 바늘로 찔러 피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뜨거운 불덩이로 간직되어진 여인이 있었다. 6년 전, 이유 없이 사라진 여인을 다시 만난 자리가 현재 애인의 집이란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최수지
지독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았고 평생의 보물을 얻었다. 사춘기적 열병으로 치부하기엔 감정의 깊이가 용납지 않지만, 비밀이 생겨버린 여자에게 재회는 상처에 소금을 붓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잡았었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놓아야 했던 유일한 사람. 더 이상의 목마름은 싫다.

여자에게 사랑이란, 감정의 사치이자 지독한 수업료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금단의 열매였고, 법에서 자유로운 지금은 관습이 용납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기란 엄청 힘겨운 일이었다.
사촌 오빠에서 남자가 된 준혁과, 은인의 딸에게서 연인을 빼앗아야 하는 수지, 짧지 않은 세월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두 사람.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갈망한다.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뿐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 설령, 세상의 비난을 받더라도.


[본문중]

약속장소엔 벌써 준혁이 앉아 있었다. 주위를 압도하는 고압적인 분위기와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 때문인지, 준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준혁답다.
검사라고 하기보다 무슨 폭력조직의 우두머리 같은 차림새에 수지는 잠시나마 긴장을 늦추고 웃고 말았다. 검은색으로 일관한 양복은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회사원으로 보이는 옷일 텐데 준혁이 입으면 왜 저리 위압감이 드는 것일까! 어쩌면 그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향기 때문일 것이다.
수지를 발견한 준혁이 희미한 웃음으로 수지를 맞았다.
“어서와.”
“안녕하세요.”
준혁의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던 사람들은 수지의 등장으로 미남미녀의 퍼즐이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남자와 청순미가 어우러지니 과연 그림이 되었다.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 여자 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조용한 탄식이 이어졌다. 여자들에게선 질투어린 한숨이, 남자들에게선 남자에 대한 부러움이 잠시 가게 안을 떠돌다 수그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혁의 시선이 가게 안을 한번 노려보고 지나감에 조용한 정적이 감돈 것이다.
“너를 만나면 제일 먼저 아이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 대답여하에 따라 너를 죽여 버리고 싶을 것 같더군. 그 아이가 내 아이라면 지난 6년의 잃어버린 아들과의 시간 때문에 너를 증오할 테고, 다른 사람의 아이라면 너의 배신의 증거로서 기쁜 마음으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어. 누구 애냐고 묻는 것조차 시간 낭비인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오빠 애는 아니란 거죠. 주말 동안 조사한 바로 그쯤은 벌써 알고 있지 않나요.”
“아주 거침없이 말하는구나. 그럼 그 앤 누구 애야? 그 남잔 왜 지금 네 옆에 없는 거지?”
“알 필요 없어요. 나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줘요. 희수 언니네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분들은 내 은인이에요. 오빠로 인해 희수 언니와 감정 상하는 일 없었으면 해요. 우린 예전에 끝난 사이이니까요.”
“훗! 그건 난 희수가 있고 넌 희범이 있단 뜻인가?”
“무슨 소리죠? 희범 오빠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거 왜 이래. 나도 눈이 있어. 그날 희범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어.”
“오빠가 어떻게 느꼈든 희범 오빠와 내 일이에요. 오빠에게 일일이 말해야 할 필요는 없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 오빤 희수 언니에게 상처주지 않음 되는 거예요.”
준혁과 희수를 연결해 생각하는 것조차 깊은 상처가 되어 수지의 가슴이 아렸지만 이곳에 오면서 다시는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도록 차갑게 대하자고 다짐하고 온 수지였다. 예상이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준혁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인선

출간작
갈망/황홀한 중독/ 그녀,사막을 품다/ 사랑인가요?/ 그의 여자, 황진이/ 사슬/사랑의 포장마자

74년생 황소자리
화르륵 끓어 넘치고, 또 그만큼 빨리 식는 양은냄비식 욕망보다 어느 정도의 예열을 거쳐 끓기 시작해 그 온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뚝배기 같은 사랑을 엮고 싶은 아직은 모자람이 많은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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