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왔어요?”
“…….”
“여자가 혼자 왔어요? 라고 물어보는데 왜 반응이 없어요? 정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여자로서?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주변 환경이 개 같은데!”
술 마시고, 정말 별 미친 짓을 다했다. 모르는 남자한테 그 무슨 추태를! 게다가 키스까지! 남들은 필름이 끊기면 죄다 잊어버린다고 하던데 난 대체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냐고. 왜 이렇게!
안 그래도 머리가 울려 죽겠는데. 후배 하나가 눈치 없이 지 맞선 자리에 대신 나가달란다. 그것도 하필이면 어제 애인이랑 끝장이 나버렸는데. 결국, 후배의 간곡한 눈빛에 이기지 못하고 나간 맞선자리에 너무나도 낯익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어제 그 깽판에 키, 키스까지 했는데! 그런데 이 남자. 날 기억하지 못 한다. 정말로, 정말로 날 기억하지 못 한다. 내가 여자로서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거야? 키스까지 했는데 아예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은밀하게 시작된 잠복. 그리고 우린 발칙하게 휘말려버렸다.

-본문 중에서-

“저기.”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냥 짜증 나서 무시하시는 건가요?”
“누구를 말입니까?”
“저를요.”
“제가 기자님을 왜 무시합니까? 오늘 처음 만났는데.”
하? 오늘 처음 만났다고? 오늘 처음? 한 번도 아닌 두 번. 두 번도 아닌 세 번! 그것도 밝은 날에 직접 대면한 사이인데 처음 만났다고? 저 남자가 진짜 나랑 한판 하자는 거야? 내가 이래 봬도 강력반에서 미친년 꽃다발 소리 들었을 정도로 꽤 성깔 있는 사람이라고!
슬슬 뚜껑 열리던 차에 저 한마디에 단아의 이성이 그대로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태하는 그야말로 태연하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한 발자국 움직일 찰나에 단아의 발에 가로막혔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밀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단아 역시 만만치 않게 살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를 정말로 처음 봤다?”
“그렇습니다.”
“정말로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단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아도 여자치고는 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이 남자 앞에 서니 살짝 올려보는 눈높이가 몹시도 자존심이 상했다.
“나, 당신이랑 정확히 세 번 만났어요. 처음엔 레드 바에서. 두 번째는 대리 맞선 자리.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그런데도 날 기억 못 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당신은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
“물론 우리 첫 만남이 썩 좋지 않은 건 알아요. 내가 잘못했고. 그래서 맞선 날 사과도 했잖아요. 퉁치자며! 그런데 이렇게 뒤끝 작렬하면 안 되지 않아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 한 달 동안은 볼 사이인데. 성격 완전 까칠하시다.”
그녀가 하는 말 중 태하가 기억하는 건 정확히 상황뿐이었다. 레드 바, 대리 맞선. 그럼 그날 만난 여자가 지금 이 여자란 소리야? 두 여자 전부다? 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왠지 모를 허탈함이 그의 입가에 스쳤고, 단아는 저를 비웃는 거라 생각하고선 끓어오르는 화를 다시금 억눌렀다.
‘사람인, 사람인! 나보다 저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참는다!’
“그뿐입니까?”
“뭐요?”
“별로 기억할 필요 없는 일 아닙니까? 전부 서로 실수잖아요. 오히려 그쪽은 잊고 싶은 기억 아닙니까?”
“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건!”
순간 태하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곤 그가 점점 그녀와의 간격을 좁혀왔고, 단아는 갑작스런 야릇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주춤하였다. 이 남자 갑자기 왜 이래. 무, 물론 나랑 키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젠 이렇게 쉽게!
“눈을 왜 감습니까?”
“아?”
단아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감아버린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코앞에 있는 태하를 마주 보았다.
“그때처럼 키스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거, 거봐. 기억하잖아! 기억하잖아요!”
괜스레 밀려드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고, 태하는 입가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얼른 숨기고서 딱딱하게 말했다.
“감각으로 익힌 건 기억하는 체질이라.”
다시금 슬금슬금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에 단아 역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서 이번엔 절대로 속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입술에서 무척 독한 맛이 났었죠? 와인을 얼마나 마셨으면. 하긴 남자한테 차였으니까.”
“이봐요!”
“그래서 나한테 작업건 거 아닙니까?”
아, 아니 기억하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디테일할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얼굴은 딱히 기억할 만한 것이 없어서 제가 기억 못 하는 겁니다.”
“뭐라고요?”
순간 부드럽게 풍기던 커피 향이 멀어지면서 그 역시 단아에게서 멀어졌다.
“오늘 인터뷰를 못한 대신, 중요한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
“포토그래퍼 공태하는 사람 얼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기억한 사람은 그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의 시선이 공허하게 맞부딪혔고, 단아는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 한다고? 무슨 병인가? 그런 병이 있나? 게다가 특별한 사람이라니…….

[미리보기]

“보통 뭐로 기억해요? 그래도 노력은 할 거 아니에요. 꼭 기억해야 할 사람도 있을 테고. 약 같은 것도 먹나? 전 공태하 씨 이름 금방 외웠거든요. 나도 뭐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내 동생 이름이랑 좀 비슷해서…….”
“그냥 기억 안 합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태하의 말에 단아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진심인 것 같았다.
“꼭 기억해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공태하가 기억하는 사람은 이 바닥에 톱이 된다고. 그런 특별한 사람만 기억한다고.”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기억하는데요?”
태하는 살짝 숨을 삼키고서 손으로 카메라 앵글을 만들어 단아 앞에 찰칵 소리를 냈다.
“사진으로.”
“…….”
“정 그렇게 저한테 기억되고 싶으면, 사진 찍어 볼래요?”
역시나 넓은 집은 다른지 전용 스튜디오도 작게 마련되어 있었다. 하늘색을 배경으로 단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렇게까진 아니었는데. 하지만 제 앞에서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태하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괜히 포토그래퍼는 아닌 건가?
“그냥 가볍게 찍어볼게요.”
“아, 예.”
가볍게, 가볍게. 하지만 플래시가 터지자마자 단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고 시선 처리와 함께 움직임도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태하는 말없이 렌즈를 맞추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열댓 장의 사진이 전부 다 느낌이 똑같았다. 나무토막.
“자, 잘 찍히고 있어요?”
태하는 찍힌 사진을 볼 필요도 없이 전부 삭제했다. 이렇게 생동감 없는 사진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사진이 정지된 예술이라고 해도 이건 진짜 가관이었다. 그리고 조금 신기했다. 그렇게 에너지 넘치던 사람이 이 조그만 카메라 앞에 이렇게 죽어 버릴 줄이야. 하지만 느낌은 굉장히 순수했다. 그가 찍는 모델들은 전부 익숙한 표정으로 다듬어진 느낌을 주니까.
“잘 찍히고 있냐니까요?”
단아는 말없이 계속 카메라 플래시만 보려니 안 그래도 뻘쭘한데, 눈까지 시렸다.
“정말 못 느꼈어요?”
그때 그가 조금 걸음을 앞당기며 입을 열었다.
“뭐를요?”
다시금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오며 셔터를 눌렀다.
“애인이랑 그거 할 때. 느끼는 척만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그건!”
다시 한 번 찰칵. 이제야 좀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말도 했어요?”
미친, 남단아. 대체 모르는 남자 앞에서 무슨 얘기를 얼마만큼 한 거야!
“다 기억하는 거 아닙니까?”
“그냥 대충 두루뭉술하게 기억하는 거죠, 두루뭉술!”
“그리고 나랑 한 키스까지?”
“그, 그것도…….”
셔터 소리가 빠르게 스쳤다. 난감해하는 표정이 꽤 잘 그려지고 있었다. 이제야 슬슬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근데 그런 건 다 기억해요?”
“감각으로 익힌 건 안 잊어버린다고 말했잖습니까.”
“엄청 쪽팔린 건 다 기억하네.”
어느새 태하와 단아의 거리가 꽤나 가깝게 좁혀졌다. 하지만 단아는 그런 걸 의식하지 못한 채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점점 말려들고 있었다.
“흠, 그러니까. 그냥 서툰 거예요.”
셔터를 누르던 태하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말해 주는 게,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난 엄청 서툴러요. 아주 꽉꽉 누르다 보니까, 어느새 기계적인 표현만 하게 되고. 결국, 상대방은 그런 나한테 너무 차갑다고 말하면서 떠났죠.”
“그럼 그냥 표현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당신이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 하듯, 나도 그런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해요. 그렇게 배웠으니까. 절대로 감정을 함부로 보여주면 안 된다. 또 그렇게 느꼈어요. 아, 그렇게 쉽게 보여주면 안 되는구나.”
‘그리고 그렇게 배웠단 말이야. 쉽게 감정 비치면 안 된다고…….’
순간, 처음 그녀가 술김에 내뱉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자꾸만 흔들리며 위태로워지자 태하는 저도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럼 제 키스는 어땠습니까?”
“네, 네?”
순간 그는 다시금 셔터를 빠르게 눌렀다. 연속으로 찍힌 사진 속에 단아의 표정은 가장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무척이나 좋은 표정이었다.
“왜 자꾸 그걸 들쳐요! 저번에 내가 미안하다고 하고 퉁 친 거 아니었어요? 의외로 되게 뒤끝 있는 거 알아요?”
“촬영 끝났습니다.”
“아, 끝났어요?”
금방 화냈으면서, 또 금방 잊어버리고 달려오는 모습에 그녀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정은 정말로 솔직하다고 느껴졌다.
단아는 얼른 태하의 옆으로 달려가서는 찍힌 사진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꽤 잘 나온 모습에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괜스레 말을 더듬었다.
“이, 이제 기억할 것 같아요?”
사진을 확인하던 태하가 단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너무 딱 붙어선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흐흠! 너무 평범해서…….”
“하? 미안하네요.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하지만 돌아선 그 순간에도 태하는 카메라를 놓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뭔가 아쉬움이 들었다. 대체 뭐지? 그때 단아가 또다시 태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또 뭡니까?”
“정 안될 것 같으면 만나서 딱 열 번 아니 다섯 번, 아니 세 번씩 이름 부르는 건 어때요?”
“뭐라고요?”
“이름을 부르다 보면 기억할 지도 모르잖아요. 공태하 씨, 공태하 씨, 공태하 씨.”
하지만 별 반응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결국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세 번씩 이름을 부르자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
“남단아 씨.”
순간,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자신의 이름에 단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로 그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단아 씨.”
두 번.
“남단아.”
마지막 세 번.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태하는 단아를 빤히 쳐다봤고, 단아도 그 시선에 얽혀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됐습니까?”
“아, 됐어요. 사진 고마워요.”
“마음에 들면 갈 때 몇 장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태하가 먼저 스튜디오를 빠져나갔고 남겨진 단아는 뭔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에 가슴을 붙잡았다.
“뭐지? 뭐지?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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