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황후 사하란의 유일한 친자인 나! 어이하여 나는 영원토록 굳게 닫혀 있어야만 했던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렸을까. 대체 어쩌자고 내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나!

일개 후궁이었던 황후 사하란. 황후가 되었다고 그녀의 과업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한의 절대권력으로 사하란이 욕망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사하란을 막아야 한다! 그녀의 핏빛 욕망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기 전에…….

“영왕비도 앞으로 몸조심하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음 표적은 바로 영친왕비이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혹시 황후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영유 황자를 한의 다음황제로 만드시겠다는 공언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황후마마께서 그 권좌에 올라서시려는 의중이신 듯하옵니다. 아니옵니까?”

2. 작가 소개

은서우

자칭 현실주의자라면서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느려터진 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 출간작

휘린(輝潾)

휘린(輝潾) 외전

휘린(輝潾) 2부

3. 차례

#제10장. 낙화(洛花) (1)

#제10장. 낙화(洛花) (2)

#제11장. 시위를 당기다

#제12장. 여름 난초의 잔향 (1)

#제12장. 여름 난초의 잔향 (2)

#제13장. 환(還) (1)

4. 미리 보기

걸음을 대여섯 번을 잇기가 어려울 만치 안개가 지독하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몰라도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정면의 광경만큼은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앞만을 바라보라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던진 시선 끝에 누군가가 닿았다. 그는 세희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영유 황자였다. 오랫동안 인사조차 나누지 못해서인지 세희는 그가 반가웠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름이 귓가에 닿았는지 영유가 돌아보았다. 그를 향했던 세희의 발이 멈칫했다. 영유가 서 있는 지점과 그녀의 거리는 어림잡아도 두 간(間)(약 3.62미터)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유의 표정이 생생히 다가왔다.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사람 같다.

헌데 눈동자가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의 표정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음울한 회청색이 묻어나올 것처럼 서글펐다. 착잡하게 갈앉은 눈빛으로 세희를 가만히 응시하고, 수많은 말들을 삼켜버린 입술로 슬그미 미소를 흘렸다. 세희는 움찔했다. 심장이 까맣게 쪼그라들게끔 아주 뜨거우면서 미끌미끌한 불안감이 뱀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외쳤다.

그러나 영유는 더 이상 세희를 보지 않았다. 몸을 돌렸다.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세희는 앞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유가 절대로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발 멈춰요. 거기에 서요!

세희는 크게 고함치며 영유를 향해 달려갔다. 진실로 그녀의 의지는 그러했었다. 그러나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누군가 석고를 발라놓거나 모래주머니들을 달아놓은 것처럼 발을 한 번 떼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세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영유는 앞쪽으로 두 번째 걸음을 놓았다. 그녀가 아무리 불러대도 영유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네 번째 걸음을 놓았을 때,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내빼고 있는 낭떠러지의 아래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몸을 던졌다. 죽음의 검은 입속으로.

세희는 날카로이 비명을 내질렀다. 금방까지만 해도 뻣뻣하던 다리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몸은 앞으로 넘어졌다. 아주 단단한 돌바닥에 무릎이 세게 부딪히면서 강한 통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세희는 아프지 않았다. 몸뚱이가 잠깐 입은 고통보다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더 거칠고 끔찍했다.

영유 황자가…… 죽었다.

“영왕비, 영왕비…… 세희야.”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세희는 간신히 악몽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눈꺼풀을 올려서는 서현의 얼굴을 보았다. 침상에서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차림새가 말끔한 그가 걱정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밤보다 어둡게 느껴지던 안개도 없었다. 지아비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불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세희는 비로소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진짜가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안도감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비록 그 빛깔이 옅을지라도.

서현도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세희의 상태가 괜찮아진 듯싶다. 세희로 하여금 제법 오랫동안 신음을 흘리거나 눈물을 짓게 만든 것의 정체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지만, 간신히 벗어난 악몽을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악몽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녀가 그것이 꿈이었음에 안도할까.

“전하께서는 왜 침상에 걸터앉아 계시나요? 진즉에 일어나셨습니까? 허면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소첩이 늦잠을 잤나 봐요.”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세희를 보면서 서현은 빙싯했다. 서현은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서는 저를 마주 보는 그녀를 도로 베개에 눕혔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으니, 더 주무시오. 마음 놓고 한숨 자도 될 만큼 시간이 남았소.”

“허나 전하께서는 이미 기침해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첩이 잠자리에 누워 있을 수 있습니까? 저도 일어나 있겠습니다.”

세희가 다시 머리를 들려고 하니, 서현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꼭 잡았다. 억지로 눕히고는 이불을 어깨에까지 끌어올렸다. 세희를 향한 그의 눈길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히려 내 맘이 불편하니, 당신은 그러지 마시오. 나야 어쩌다가 깨어버린 잠이 도로 오지 않아서 조금 일찍 일어났을 뿐이오. 해서 한쪽에서 조용히 서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당신의 숙면을 방해했나 보오. 미안하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허면 소첩은 조금만 더 눈을 붙이고 있겠습니다. 을시초각(乙時初刻, 오전 6시 30분)이 되면, 저를 깨워주세요. 저더러 더 자라고 그냥 두시면 안 돼요. 꼭 시간을 지켜주세요.”

“알겠소. 내 반드시 그리하리다.”

서현의 답변을 듣고 나서야 세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정인의 얼굴을 봐선지 몰라도, 무시무시한 악몽을 연이어 꾸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서현은 이불에 포근히 안긴 어린아이를 재우는 보호자처럼 다정한 손길로 천천히 세희의 몸을 도닥였다. 그녀의 마음에 작은 불순물처럼 남은 불안감을 완전히 떼어주려는 양, 혹은 자신이 옆에 있으니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해주듯이.

그로부터 일각을 조금 더 넘겼다. 세희는 스르르 잠으로 잠겨들었다. 서현은 그녀의 숨결이 아까보다 훨씬 평온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세희의 머리맡을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손등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현은 세희가 잠결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직이 흘렸던 말을 기억했다. 홀로 심지를 태우는 등잔불빛에 기대어 슬며시 책장을 넘기는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던 그것. 만일 그도 잠의 자락에 싸여 있었다면, 흐릿한 의식에서 순간적으로 잘못 들었으리라고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때 그의 의식은 아주 또렷했었다. 양쪽 귀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영유 황자, 제발 그러지 마요. 거기로 가면 정말 위험해요. 제발 멈춰요. 거기에 서요. 황자…….」

꿈은 애매모호하고 비현실적이다. 그러므로 그녀더러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세세히 캐묻는 것 자체가 합당하지 않다. 헌데도 세희가 꿈결에 흘렸던 말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때마침 자신도 영유에 대해 불안한 예감을 느꼈던 탓인가. 사실 영유를 향한 염려 때문에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황후와 동인들이 영유를 황태자위가 걸린 싸움판에 다시 세우고자 애쓰는 판국에 정작 당사자는 침묵을 일관했다. 의헌궁에서 보름간 근신하라는 황명은, 타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데에 이용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서현은 마음이 어수선하면서 걱정스러웠다. 행여나 영유가 어떤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을까 봐.

서현은 얼결에 한숨소리를 흘리는 것을 막고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세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에 깊이 빠졌다. 서현은 조용히 세희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부디 그녀의 악몽 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