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작은 섬 백월도, 조용하고 간결했던 동화의 시간.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를 찾아온 성북동 할머니의 제안.

갑작스러운 상경은 그녀의 일상을 흔들어놓는데…….

“어제 태헌이 그 자식, 너한테 인사도 제대로 안 하지?”

“태헌이요? 아…… 큰손자분이요?”

“응. 내가 배에서도 말했지? 걔는 그냥 상대하지 마. 그냥 여기 같이 사는 이상 안 부딪치는 게 상책이다. 너는 그놈 당해내기 힘들어.”

성북동 그 집에 사는 세 남자.

동갑내기 삼수생, 막내 명헌,

눈웃음이 매력적인 둘째 제헌.

그리고 무서우리만큼 반듯하고 잘생긴 남자, 첫째 태헌.

“당장 짐 싸. 일단 호텔로 가고, 있을 곳은 내일 알아봐줄 테니.”

“…….”

“내 말 안 들려?”

제때제때 대답 안 하면 죽일 듯 보는 눈은 손자나 할머니나 똑같았다.

“……들리는데요.”

“뭐?”

뜻밖의 당돌함에 그도 자세를 바꿨다.

“왜 대답이 없지? 못 나가겠다는 건가?”

태헌은 곤란한 상황에 먹잇감 밀어넣고 즐기는 사자처럼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댔다.

그런데 그 인형이 의외였다. 목소리가 작은 거 빼고는 말이나 행동이나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대답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예요…….”

“…….”

“할머니가 절대로 아저씨 상대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말 못 해요. 죄송합니다.”

그와 그녀, 두근두근 동거를 시작하다!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2016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수상)

당신의 자리

취향의 문제

겨울, 또다시

비 내리는 밤

3. 차례

#18

#19

#20

#21

#22

#23

#24

4. 미리 보기

“야, 너 이제 막 나간다?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건데?”

“어. 나도 그렇게 됐는지 몰랐어. 구경하느라.”

“잘하는 짓이다. 너 할머니 오면 다 말해야지. 작은형도 봤으면 한소리 했을걸? 출장 갔기에 망정이지.”

“명헌이, 너 얼른 밥 안 먹니?”

어제 일을 떨치려 더 분주히 그릇을 나르던 동화가 민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손이 느려졌다. 어젯밤 명헌은 문 앞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이를 갈더니 아침 먹는 자리에서도 못마땅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너는 네 일이나 잘해. 지금 너한테 누가 몇 시에 오고 말고가 중요해?”

“엄마는 또 왜 그래. 그러면 한집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지 아닌지는 알아야지. 아, 진짜.”

“언제까지 있을 줄 알고 매일매일 그걸 챙겨? 쟤도 그게 편할까? 안 그러니, 너?”

어제 일을 두고 동화가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꺼낼까 예민해져 있던 민혜는 막상 아들이 쓸데없는 온정이 넘친다 싶으니 화살을 식탁 너머로 돌렸다.

“……네, 이제 제가 알아서 빨리 다닐게요. 명헌아, 너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야.”

“너 근데 시험 점수 많이 올라서 좋겠더라. 나도 이제 그래야 하는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래도 입안이 까슬한 건 어쩔 수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쥐고 있던 물 잔의 표면을 문질렀다. 예민한 손끝 아래 울퉁불퉁한 굴곡이 냉수의 시원함보다 입안에 먼저 닿았다.

“들었지? 동화 쟤도 저 대학 가는 게 바쁘지. 그러다 봄 돼서 학기 시작하면 나가는 건 금방일 거고. 그러니까 너도…… 명헌아, 너 어디 가?”

“됐어. 엄마나 먹어. 먹으려면 말 좀 그만하고.”

명헌이 대리석 식탁 위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컸다. 혹여 큰 소리 나는 거 아닌가 긴장감이 가득하자 음식을 내려놓던 아주머니들이 더 꼼짝을 못 했다. 거기에 명헌이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났으니 동화도 답답한 가슴을 쓸었다. 이른 새벽부터 몸이 으슬거려 두어 번 깨고 나니 오늘은 잘 먹는 척 버티는 것도 힘이 들었다.

“무슨 밥 한 끼를 편하게 못 먹게 하냐, 엄마는.”

“안명헌, 앉아.”

언제 온 건지 완벽한 차림의 태헌이 부엌 입구에서 냉담한 시선을 들었다.

“……아, 진짜.”

“아니면 나가든가.”

마주 보던 명헌이 거친 숨소리를 몇 번 내다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잠시의 간격으로 태헌도 의자를 끌었다.

“태헌이 넌 명헌이가 뭐랬다고 그렇게 아침부터…… 그래도 동생인데 제헌이 같으면 그렇게는 안 했어.”

“불만 있으시면 굳이 그렇게 불편한 식사 하실 거 없습니다.”

“넌 어쩜.”

“이 집 주인은 제헌이가 아니라 저니까요.”

태헌이 눈 한 번을 안 맞추고 태연하게 수저를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성격도 아니라 민혜가 쌩하니 자리를 떴지만 의외로 명헌은 자리에 남아 팔짱을 꼈다. 마주 보지는 않아도 어쩐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동화도 바쁜 척 젓가락을 다시 놀렸다.

“야, 윤동화, 너 요새 좀 수상한 거 알아?”

“내가 뭘. 그리고 빨리 먹어. 너 이거 줄까?”

명헌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지레 숨이 가쁜 그녀가 자신의 앞에 있는 갈비찜 접시를 밀었다. 그러나 채 몇 센티도 옮기기 전에 위에서 단단히 힘주어 누른 젓가락에 멈춰버렸다.

“윤동화, 쓸데없는 짓 말고 너도 네 밥이나 먹어.”

“우와, 큰형 진짜 아침부터 분위기 한 번.”

“안명헌, 마지막 경고야. 입 다물어.”

“알았어, 알았어. 지금 먹어. 아, 무슨 자기가 독재자야? 자기 명의라고 진짜 유세 하나는…… 야, 윤동화, 나 대학 가기만 하면 할머니랑 약속한 거 있거든? 집 끝장나는 거 하나 얻어서 독립하면 내가 특별히 너…….”

쾅,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태헌이 물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깨부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예전에 더 철이 없던 시절 이런 일을 몇 번 겪어본 명헌은 나오던 말까지 모두 감추고 흰밥만 가득 퍼 넣었다. 큰형은 자기 손 더럽히며 밥상 뒤엎지는 않아도 사람 피를 어떻게 말려야 가루조차 남지 않는지 잘 아는 남자였다.

“식사 끝나기 전까지 내 식탁에서 둘이 한마디도 하지 마. 시끄러우니까.”

태헌이 신경질적으로 손목 한 번 놀리자 닿아 있던 젓가락으로 갈비찜이 원위치했다. 태어나서 시끄럽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그녀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해졌다. 할머니도 없고 제헌도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속 편하게 한 술이나마 뜨게 될 줄은 몰랐다.

콜록콜록.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적막하던 식탁에 동화의 기침이 끼어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방금 전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태헌의 말이 걸려 바로 곁눈질을 했다. 이거 가지고 화를 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째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그가 재빨리 컵부터 내밀었다.

“마셔. 괜찮아?”

“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러기에 처음부터 왜 그런 옷을 입고!”

“아저씨! 그냥 식사하세요. 명헌이도 있는데…….”

맞은편의 명헌은 한발 늦게 내민 물 컵조차 거두지 못하고 어정쩡히 멈춰 있었다. 심기 불편한 태헌이 스르륵 눈을 들 때까지 그는 가시라도 넘긴 듯 찝찝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하는 거나 둘이 앉아 있는 걸 보면 뭐가 있어도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쉽사리 입 밖에 낼 만한 일도 아니었다. 명헌 역시 큰형인 태헌 못지않게 자기만 알고 살아온 인생이라 남의 감정선은 눈 가장자리에도 담은 적이 없건만 어쩐 일인지 냉수가 고파졌다.

이상도 하지. 그러고 보면 왜 둘이 저렇게 앉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아무도 태헌 옆자리에는 안 앉으니 자연히 속없는 윤동화가 심청이마냥 희생했다 으쓱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태헌의 그릇을 챙기는 그녀를 보니 심청이치고는 불행의 그림자는 요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치마 뒤집어쓰고 인당수 뛰어드는 애치고는 저렇게 밝을 수가 없다.

“야, 윤동화, 너 다 먹은 거 맞지? 진짜 한마디도 편하게 못 하겠네.”

“어, 왜? 나 불렀어?”

그릇을 모아 싱크대로 향하던 동화가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렸다. 무뚝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태헌과 다리를 꼬고 있던 명헌 둘 다 이유도 없이 흠칫거렸다. 이어 사이 안 좋은 형제간에 시선이 부닥치며 기 싸움이 오갔다. 조금 전에 태헌의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렸던 것이 내심 비굴해 보였을까 신경 쓰던 명헌인지라 이번만은 지지 않겠다 두 눈을 부릅떴다. 모 아니면 도라고 주먹까지 불끈 쥐며 기를 세웠지만 태헌이 바로 일어서자 꼬고 있던 다리부터 풀어졌다. 그래도 빳빳한 턱만 여전한 것을 보고 태헌이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아, 왜? 밥 다 먹고 말 거는데. 뭐, 어쩌라고?”

“…….”

동화까지 돌아보고 있으니 더욱 오기가 붙었다. 사실 태헌에게서 꾸준히 무시를 당해왔지만 생각해보면 태헌은 아주 어릴 때에도 폭력을 쓴다거나 욕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태헌 같은 인물에게서 무시를 받는다는 자체가 자존심과 자존감을 건드렸다.

내 존재가 정말 저런 눈빛을 견뎌야 될 정도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쌓이고 쌓이자 만년설처럼 자격지심만 단단해졌다. 할머니도 없고 평화 사절단 역할을 하던 제헌도 없으니 오늘만은 더 참지 않겠다 태헌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귀 따갑게 큰형은 가장이라는 말을 들어왔으니 차마 먼저 대들지는 못했다.

“안명헌.”

“아, 왜애? 형이 왕이야?”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태헌은 노기조차 없었다. 그저 또렷하고 강한 눈으로 건너다보더니 시선만 살짝 아래로 낮췄다.

“네 그릇 네가 치워.”

“뭐?”

식사 시간 동안 나가 있던 아주머니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동화가 일어났으니 아마도 그들의 그릇 역시 누구 손 기다릴 것 없이 동화가 가져갈 터였다. 명헌이 멍하게 눈만 껌뻑거릴 동안 태헌은 자신의 국그릇을 겹쳐 싱크대로 다가갔다. 아주머니들이 멀리서 보고 바로 달려왔지만 태헌은 먼저 손을 닦고 나가는 한 사람만 지켜보았다. 고개가 삐딱한 명헌이 툴툴거리며 거실 밖 가방을 가리키자 동화는 한 번 앉을 새도 없이 따라 나갔다.

“사장님, 그냥 두시죠. 송구스럽게 뭐하러요. 저희가 하면 되는데. 동화 학생이 하도 빨리 치워서 때를 놓쳐가지고는…… 매번 온다고 오면 벌써 설거지부터 하고 있어선. 아유, 부지런도 하지. 또 도서관 가려나 보네.”

“아주머니.”

“네?”

“동화, 우리 집에서 월급 받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낮은 목소리였지만 듣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자신이 일어났을 때 이렇게 바로 달려올 거라면 동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이런 거야 온전히 관심의 문제니까.

“……아니, 저희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한다길래.”

“이 집에서 가장 어른인 할머니 손님입니다. 손님 대우 제대로 해주시죠.”

별채에서 그의 아침을 챙길 때에는 혹시나 싶던 일도 확실히 발 들이고 나니 이 집에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 것만 같다. 제 방도 여기에 있는 엄연한 이 집 구성원인데, 잠깐 지켜보기로도 그 많은 고용인 중 누구 하나 그녀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오만함은 없지만 제 것 못 지키며 남 위해주는 넉넉함도 없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달아둔 ‘부지런하네.’ 하는 칭찬이 그 자리를 나서고도 더없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