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워싱턴 D.C.

상자를 포장하는 덱스터 위틀로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전날 월마트에서 훔친 포장용 테이프로 여섯 모서리를 빙 둘러가며 빈틈없이 붙이고,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훔친 검은색 매직펜으로 단정하게 주소를 적었다. 포장이 끝나자 매직펜과 테이프는 땅바닥에 그대로 버려둔 채 상자만을 옆구리에 소중히 안고 가까운 우체국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우체국은 한 블록 앞에 있었다. 워싱턴 D.C.의 2월 날씨치고는 춥지 않은 오후였다.
자신이 하원의원이라면 우표 쪼가리를 붙이느라 시간이나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에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졌다.
한겨울의 메마른 햇살이 보도를 쓸어 내리고 있었다. 성실한 인상을 한 나라의 일꾼들이 제각기 바쁘다는 표정으로 옷깃을 스치며 분주히 오갔다. 마치 세상의 외투는 회색이나 검은색뿐이라는 듯이 일제히 검은색과 회색 외투자락을 펄럭이며, 모두들 대단한 중요한 인사(人士)라도 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누군가 나서서 그들의 길을 막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진짜 직업이 회계사나 회사원이라 하더라도 ‘회계사’라거나 ‘회사원’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신분이나 직업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 워싱턴 D.C.에서는 누구나 ‘국무성 직원’이나 ‘재무성 직원’을 사칭했고, 그보다 좀더 대담한 사람이라면 ‘DOD’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DOD? 그건 국방성(Department of Defense)의 머릿글자였다. 그러나 덱스터는 이 성실한 표정의 인간 군상들에게 제각각 ‘DOB’라고 쓰인 명찰을 하나씩 달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DOB’란 ‘개뿔딱지성(Department of Bullshit)’이라는 말로, 덱스터가 생각하기엔 워싱턴에 모여 사는 인종들에게 딱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미합중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대기에서는 권력의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는 마치 진귀한 와인의 향처럼 감질나게 사람들을 유혹했고, 오늘도 이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인간 군상들은 그 향기를 손으로 붙잡겠다고 모여든 머저리들이었다. 덱스터는 경멸하는 듯한 차가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각각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는 빈깡통 같은 머저리들.
저들은 진짜 권력, 펄펄 끓여 증류해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려 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권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백악관의 노신사는 말 한마디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프로 풋볼의 승부를 조작할 수도 있었다. 그에겐 단 두 사람만이 비밀번호를 아는 서류가방을 제 손목에 수갑으로 연결해서 들고 졸졸 쫓아다니는 똘마니도 있고, 순식간에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폭탄 때문에 죽어가는 수백만의 아우성은 전혀 느끼지 못할 인간이었다.
덱스터는 진짜 권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오래 전 베트남에서 방아쇠를 천천히 당길 때 손끝으로부터 전해지던 그 권력의 느낌.
덱스터는 며칠이고 꼼짝없이 표적을 추적하곤 했었다. 때로는 진흙 속에 처박힌 채, 때로는 사정없이 피부를 찔러대는 잡초더미 속에 몸을 숨긴 채. 벌레와 뱀 그리고 비와 배고픔도 모두 무시한 채 표적의 얼굴이 스코프 안에 보름달처럼 들어차고 망원렌즈의 십자선이 그가 원하는 부위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그런 완벽한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는 모든 권력이 그의 손가락 끝에 머물러 있었다. 표적의 생명을 끝장내느냐 마느냐, 방아쇠를 당기느냐 마느냐, 온 세상이 바로 그 두 사람, 덱스터와 표적에게로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덱스터의 지나온 생애에서 가장 스릴 있었던 순간은 한 정찰병이 그의 전방 어떤 나무 위에 나뭇잎으로 위장한 누군가가 있다고 알려주었던 때였다. 스코프를 천천히 나무 위로 조준하자 또 다른 저격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외모로 보아 러시아인이었다. 저쪽의 저격수도 라이플의 총대를 어깨에 가누고 덱스터 쪽으로 스코프를 겨눈 상태였다. 덱스터가 그를 잡은 것은 간발의 차이였다. 1초나 되었을까. 덱스터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만약 거기서 심장박동이 한 번 더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면 러시아 저격수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고, 그랬다면 오늘 덱스터가 살아서 워싱턴 D.C.의 경치를 구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덱스터는 그 러시아 저격수가 자신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도 전에 총알이 저격수의 두개골을 박살냈을 테니 덱스터의 얼굴에 눈이 두 개라는 것도 세지 못했을 것이다. 특수효과가 발달된 요즈음 영화에서는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총알을 가슴에 맞는 장면도 보여주지만, 날아오는 총알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덱스터는 온기가 도는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뒤에 줄을 섰다. 우체국이 가장 붐비는 점심시간을 택한 것은 재수 없게 호기심 많은 우체국 직원이 혹시라도 그의 얼굴을 기억할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눈매는 보통 이상으로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덱스터에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큼 유난히 튀는 부분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지 않는 덱스터였다. 그러한 조심성 덕분에 베트남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고, 그 지옥의 정글에서 돌아온 후에도 25년간이나 목숨을 빼앗기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미디어 리뷰가 없습니다.

별점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