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저를 증오하십시오.”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광룡의 추종자, 헤일럿 이어스티.

악을 추종하는 그는 로스칼츠 왕국의 주신(主神) 라이네르에게 선택받은 6인의 대사제 중 한 명이며, 신을 섬기고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본분을 거스른 가치관을 가진 헤일럿은 어느 날 아침, 악을 무찌른 영웅의 이야기를 듣는다.

‘영웅이 광룡을 봉인해 평화를 되찾았다’는 것.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광룡이 봉인됐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 영웅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는 헤일럿에게 더 당혹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그 영웅이 헤일럿의 연인이라는 것.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에 헤일럿은 깨닫는다. 자신의 기억이 3년 전에서 끊겨 있다는 사실을…….

작가 소개

지은이 : 빼너너

살다 보니 회사가 글을 쓰게 만드네요.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으로 선택한 글쓰기인지라, 아직 경험이 미흡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목차

1권

프롤로그

1. 영웅

2. 해빙 (1)

2권

2. 해빙 (2)

3권

2. 해빙 (3)

3. 제문 (1)

4권

3. 제문 (2)

에필로그

외전 1. 소원

외전 2. 취목

외전 3. 맞닿는 곳

책 속으로

견습사제인 라디크가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벌컥 문을 연 헤일럿은 라디크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이에요, 헤일럿님.”

헤일럿은 그 인사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뭘까. 정말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어째서인지, 헤일럿의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키가 큰 라디크가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헤일럿의 가슴까지 올라오던 소년이 어느덧 한 뼘 차이로 아래에 있다.

“라디크, 언제 이렇게 컸죠?”

헤일럿의 질문에 라디크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품속에 안고 있던 것을 헤일럿에게 넘기며 여전히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쑥스럽게.”

라디크가 건네준 것은 자료가 아니라 짙은 푸른색 공단으로 만든 망토였다. 헤일럿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라이네르를 상징하는 색이긴 했지만 이것은 지금도, 미래에도 절대로 쓸 일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왕과 신에게 선택받고 세계를 위해 크나큰 공헌을 세운 사람의 어깨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리고 헤일럿의 기억에 의하면, 현재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는 광룡을 죽이는 자.

광룡은 버젓이 살아 있으며 인간들은 나날이 공포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 아인 왜 이걸 꺼내 온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헤일럿을 알아차리지 못한 라디크가 말했다.

“그래도 헤일럿님 역시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다행이에요. 영웅께 세례를 내려주는 주역이니 긴장 때문에 늦게 잠자리에 드신 것 같아 걱정했거든요. 어서 대기도실로 가죠. 축복의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까요.”

꿈을 꾸는 걸까.

헤일럿은 라디크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게 무슨 소릴까.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걸까? 영웅? 세례? 있을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라디크의 밝은 얼굴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광룡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를 들으며 울면서 기도하던 슬픈 얼굴엔 절망이 아닌 희망만이 가득했다.

있을 수 없는데.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무슨 영웅이요?”

“예?”

라디크는 크게 놀란 얼굴로 헤일럿을 봤으나 곧 얼떨떨한 웃음과 함께 애써 맞춰주는 기색이 역력한 밝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에이.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면 진짜 같잖아요. 헤일럿님도 참 짓궂으시다니까. 하긴, 리스칼님이 광룡을 봉인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평화를 되찾은 건 너무 오랜만이니까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놓칠 뻔했다. 평온하던 머릿속에는 겨울의 칼바람보다 더 서늘하고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광룡을 봉인한 영웅이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인간들을 학살하던 광룡을 어찌할 수 없어 절규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영웅이 광룡을 봉인했다니. 헤일럿의 희망이 봉인됐다니.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혼란으로 떨려오는 손에 애써 힘을 주어 버티면서 헤일럿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신전 내에 숨어든 광룡의 추종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사제들부터 떠보는 왕의 심리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금 라디크의 말에 걸려들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광룡의 봉인을 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이 잘릴 것이다.

헤일럿은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디크를 향해 언제 동요했냐는 듯 생긋 웃으며 평소의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지금 가지 않으면 늦어질 것 같네요. 이만 갈까요?”

“앗, 네!”

손에 쥔 푸른 망토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반듯하게 접은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대기도실에서 다른 대사제들을 보면 라디크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걸음이 빨라졌으나 라디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월하게 뒤따라왔다.

헤일럿은 점점 가슴을 짓누르는 초조함에 망토 아래로 감춘 손을 꼭 쥐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존재할 수 없는 영웅에 의해 광룡이 하루아침에 봉인당할 가능성은 거의 0퍼센트에 가까웠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더더욱 심장이 떨렸다.

정말 광룡이, 제 희망이 봉인당한 거라면.

라디크가 입에 담았던 영웅의 이름을 떠올렸다. 리스칼. 손에 든 망토를 그의 어깨에 둘러주는 역할이 헤일럿이라니 곧 만나게 될 것이었다.

정말 광룡이 봉인당했고 리스칼이란 자가 봉인한 게 맞는다면, 리스칼을 죽이는 역할은 필시 헤일럿이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광룡의 추종자 헤일럿 이어스티의 역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