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그녀가 어느새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녀 곁에서 그녀를 지며보기만 하면 언젠가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향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렸다. 부디 행복하라고 비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그녀는 남편의 함정에 빠져 살인용의자가 되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맹세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위해 살겠노라고.
그리고 3년 후. 드디어 그녀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드디어 시작된 그녀의 복수, 그리고 그 복수를 위해 기꺼이 복수의 도구가 된 그는 오로지 그녀의 복수가 성공하기만 바랐다. 자신에게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사랑하는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는 순간.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녀가 그 다음에 올 사람과는 정말 행복하기를…….




-본문 중에서-


자신이 예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편지봉투 하나가 한편에 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떨림으로 편지봉투를 열어 그 속에 든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역시 시후가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언제 써 넣어 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던 그가 서현에게 남긴 것 같았다.
[서현아…… 아니, 내 아내 위서현 씨.
이렇게 부르기가 너무 낯설고 힘들어 정작 당신 앞에서는 한 번도 불러 준적 없었지?
미안해! 내게 너는 항상 13살의 소녀였고, 25살이 철없는 아가씨였기에 세월이 흐른 것도 내 아내가 되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살았었어.
널 사랑했던 지난 17년이 너무 행복해서 너무 빨리 흘러가 버려서 아쉽지만,
그래서 신이 내게 서른일곱해만 살다 오라고 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네 곁에서 보낸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아. 정말이야…….
네가 그랬었지? 우리가 좀 더 일찍 서로를 사랑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했지?
아니, 난 우리가 조금 늦었을지라도 우리 사랑은 다른 그 어떤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깊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네가 내 여자라는 사실이 좋아 미칠 것 같았던 그날들이 너무 빨리 왔었다면 아마도 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벌써 네 곁에서 사라지고 없었을 지도 몰라. 그나마 네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조금 늦게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야.
지금…… 서현아. 울고 있니?
날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것은 아니지?
내가 사랑하고 내가 알던 위서현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그 아름다운 여자가 나라는 남자 때문에 울고 있다면 난 그 곳에서도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아.
난 진심으로 네가 최시후라는 이름조차 잊고 다시 행복했으면 해.
이제 서른인 네게 날 기억하며 살라고 하고 싶지 않아.
이미 네 곁을 떠나 버린 사람에게 연연해서 네 인생을, 나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을 저버리고 그렇게 슬픔에 젖어 살아가는 널 보면 그 곳에 있는 내가 아플 것 같아…….
그러니까 나같이 먼저 널 두고 떠나버린 남자 따위는 잊어버리고 멋지고 잘나고, 너만 사랑하는 남자 만나 다시 사랑도 하고 다시 결혼 해.
그렇게 그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다가 먼 훗날 그 곳으로 와야 할 때가 되면 그때는…… 그때는 말이야…… 그 사람에게 얘기 해줘.
그 곳에 오랫동안 널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 내가 있다고.
그래서 그 곳에 가서는 온전히 나 최시후의 여자로, 아내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 줘.
그렇게 나, 다음 사람에게는 나처럼 오랜 세월 기다리지 않게 마음자리 내어 주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말고…….나, 다음 사람에게는 너란 여자가 없어도 나보다 덜 아프도록 미리 많이 사랑해주고…….
나, 다음 사람에게는 그와 너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있을 테고 추억도 나보다는 더 많을 테니 이제는 나와 있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 두고 내게 와 줘. 그 곳에서 너만 기다리고 있을 바보 같은 나한테 한걸음에 달려와 줘. 나, 다음 사람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정말 행복하게 살다가…… 오랜 시간 지나…… 내게 와줘.
사랑한다. 위서현. 정말 사랑한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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