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네 전부를 주게 될 거야. 피도 살도 마음도. 네가 가진 그 무엇 하나 상대에게 주지 못해 안달 나게 될 거야. 그렇게, 내어주는 만큼 너는 상대의 모든 걸 취하고 싶어지겠지.”

‘평생에 걸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은 리온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홉 살의 어린 그가 이젤디아를 만난 후, 그 말은 곧 그의 삶이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저 운명이었다.

“가지 마, 이젤디아. 내 곁에 있어줘. 여기서 나와 함께 있어. 사랑해. 내 앞으로의 인생은 네 옆에서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왜……, 언제부터?

아니, 이건 다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고백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상대는 귀족에 어린아이에 내 의뢰인이니까!

“원한다면 내 전부를 줄게. 옆에만 있어준다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젠장, 내 첫 고백은 이 어린 꼬마한테 받은 게 되는 건가?

2. 작가 소개

리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K575

▣ 출간작

벽의 꽃은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3. 차례

#Chapter 5.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Chapter 6. Reminiscence

#Chapter 7. Castle in the Air

4. 미리 보기

팔 근육 아래 짓눌려 숨이 새는 바람 소리와 함께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리온은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목소리에 순간 숨을 멈추었다.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얇은 옷감을 타고 피부로 전해졌다.

흐드러진 짙고 어두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리온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저를 습격한 암살자의 눈은 연한 회색빛이었다. 머리색은 달랐지만 저 눈을, 그 얼굴을 리온은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넋을 놓은 사이 그대로 시야가 뒤집혔다. 리온은 제 위에 올라탄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다.’

머릿속의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이자 온몸의 털이 흠칫 곤두섰다. 그래, 그녀야.

“이젤디아.”

내 사랑, 내 요정님, 나의…… 전부.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리온은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노라고. 이렇게 넘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으니 이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라는 제 걱정은 정말이지 바보 같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이젤디아, 내 요정님.”

그녀는 그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목 끝에 들이밀어진 칼날이 저를 조금도 기억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알려줬고 이내 제 얼굴을 알아보고 황급히 칼을 거두는 손길에서 예전처럼 애매한, 하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운 상냥함을 볼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짓궂은 운명의 신은 어느 날은 제게 달콤한 과실을 던져주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이 닿지 않는 깊은 절망을 주곤 했다. 그리고 오늘, 신은 그에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안겨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곤란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리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젤디아와 다시 만난다면 좀 더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온은 그저 그녀와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더 이상 퍼낼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제 마음은 이렇게나 가득, 그녀를 향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저와 같았다. 그 사실이 기쁘고도 서글퍼 리온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예상치도 못한 만남은 리온에게 가슴 벅찬 기쁨을 준 것과 동시에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젤디아를 그리며 고민하고 고뇌하던 나날들은 오만하고 가지고 싶은 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던 콧대 높은 어린 소년을 겸손하고 이성적이며 누구에게나 예를 갖출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단순히 그를 ‘예의 바른’ 사람으로만 만들지는 않았다. 시간은 아이였던 리온이 어른의 계단을 밟게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일전엔 없었던 계산과 교활함이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리온은 일부러 저를 암살하려 했던, 혹은 납치하려 했던 이젤디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침대 아래 정체 모를 약물이 묻은 천이 있는 걸 발견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실소가 나올 정도로 허술한 암살자였다.

보아하니 15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을 호위해줬을 때처럼 이름 모를 불법적인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너무 캐묻는다면 그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더불어 그는 일부러 연약하고 유한 면모를 내보였다. 정이 많아 마음 약한, 그렇기에 어중간하게 상냥한 이젤디아라면 분명 그를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문 한 짝을 떼어내면서까지 도망치는 건 분명 예상 밖이었지만 리온은 사용인들이 그녀를 찾기 전에 이젤디아가 제 발로 저택으로, 그리고 그에게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 강한 확신이 들었다.

“도, 도련님!”

아직까지도 귀족들의 뒤를 봐주는 그 불법 조직에 속해 있고 지난밤 침대에서 저를 위협했던 걸 떠올려볼 때 그녀는 분명 자신에게 혹은 하트하르스 가문에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젤디아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걸까?

리온은 몇 달 전 국경 부근에서 신성국 하일린과 있었던 충돌을 떠올렸다. 과거 사교계에서 벌였던 소소한 사건들이나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는 정치적 라이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사교계에서의 일은 리온 역시 할 말이 많다. 그저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않고 받아쳐줬을 뿐으로, 그 결과 결투로 이어졌더랬다. 물론, 그들 중 리온의 상대가 될 만한 이는 없었기에 항상 허무하리만치 쉽게 마무리 지어지곤 했다.

어쨌든 뒷세계의 조직까지 이용해가며 하트하르스 가문에 접근할 만큼 원한이 큰 쪽은 역시 신성국 쪽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일린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역시…….

‘아니, 그만두자.’

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의 목적이나 배후에 누가 있는가가 아니라 이젤디아, 그녀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가 저를 노린 이유 따윈 나중에라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은밀히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젤디아의 행방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찾아야 할까? 아니, 어떻게 내 곁에 머무르게 하지?’

설령 운 좋게 이젤디아를 다시 찾아낸다 하더라도 힘으로 그녀를 데려올 가능성은 바닷가에 흩어진 모래알갱이 속 금싸라기를 찾을 확률만큼도 없었고 계속 제 곁에 머무르게 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아니, 정말로 가까운가?

‘차라리 본가로 데려갈까.’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리온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깜빡였다.

‘그래, 차라리 저택으로 데려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해주자. 그러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까?’

원하는 게 제게 있는지 하트하르스 가문 그 자체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가만큼 하트하르스 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쉬운 곳도 없었다. 그곳이라면 목적이 어느 쪽이든 이젤디아는 제 곁에 있어줄 것이다.

‘어쩌면 날 이용하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꽤 불건전하고 뒤틀린 생각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렇다면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우선은 이젤디아를 찾아야 했다.

“리온 도련님!”

바로 그때였다. 똑 뜯어진 문을 바라보며 만약을 위해 이젤디아가 나오지 못하려면 얼마나 문이 튼튼해야 할까, 따위를 고민하던 리온은 곧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 과거, 골목길에서 건달들을 상대하던 그녀가 녹슬고 무딘 칼날을 진흙을 우그러뜨리듯 구기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이름 모를 시종의 부름에 리온은 몸을 돌렸다.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리사, 아니 아가씨가…….”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시종이 말하는 리사가 이젤디아의 가명임을 바로 떠올린 리온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미인의 미소를 직격으로 받은 시종,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순간 넋이 나갔지만 기특하게도 이내 정신을 차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어요. 부시종장님이 데리고 오시는 중이에요.”

“그래, 그렇군.”

리온은 구태여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숨기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젤디아가 원하는 건 제가 아닌 자신이나 자신의 가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체 모를 무언가였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리온에겐 그만큼 이젤디아의 마음을 매료시킬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고 그렇게만 된다면, 리온은 제 목숨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전부 네 것이니까.’

아주 오래전, 그가 직접 그렇게 정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각오에 응하듯이 돌아온 이젤디아는 그와 함께 수도로 가겠다는, 리온이 바라 마지않던 대답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