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말해야 알아? 후, 그럼 말해 줄게.”

“…….”

“사귀자, 박유림.”

‘열심히 살자’를 뼈에 새긴 채, 단 1초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매사 악착같이 살고 있는 악바리 그녀, 박유림.

그 누구도 곁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그녀였건만,

연애 따위 사치일 뿐이라고 외면하던 그녀였건만,

어쩐 일인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그 남자, 정윤수.

하지만, 단 한 번의 기억도 나지 않는 ‘MT 때의 사건’으로

그와 ‘원수 아닌 원수’가 되어 더없이 멀어져 버린다.

그런데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하기만 한 그 남자와 왜 자꾸 부딪히게 되는 걸까?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그와 그녀의 전쟁 같은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문 내용 중에서]

“이거 실망이네.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만 기억하다니.”

“…….”

“그날 니가 날 덮쳤잖아.”

“뭐, 뭐라고요?”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건가. 내가 누구한테 뭘 해?

“너 내가 티셔츠 벗자마자 빼앗아 갔잖아. 키스하면 돌려준다고 했는데. 기억 안 나? 그래서 우리 보름달 뜬 개울가에서 키스했잖아. 사실 니가 덮친 거지.”

“자, 장난치지 마요.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장난? 키스하느라 내 티셔츠가 니 발밑에서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애들한테 물어봐. 내 티셔츠가 얼마나 더러웠는지.”

한 손에는 엉망이 된 티셔츠를 든 윤수 선배가 험악한 표정으로 숙소에 돌아왔다는 소리를 은주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서, 설마…….”

난 그대로 길바닥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전생에 선녀와 나무꾼도 아니고, 남의 티셔츠는 왜 빼앗아 가서 대가로 키스를 받아낸단 말인가. 그것도 기억 못할 주제에.

“아니죠? 선배, 정말 장난이죠?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술 마시고 아무한테나 막 들이대는 그런 여자 아니라고요.”

“그때 우리 꽤 격렬했는데.”

“선배, 아니라고 해줘요.”

“처음인 게 티는 나더라.”

“악! 선배!”

“걱정 마. 그래도 좋았으니까.”

아니라고 부인하는 내게 그 사람은 확인 사살을 퍼부었다.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날의 기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취하도록 술을 마신 건 그때가 처음이라 평소 나의 술버릇을 모르는 상태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키스라니.

이성으로 억눌러 왔던 본능의 발현인가.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아니라고 소리쳐 봐야 그 사람은 그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키스 사건의 감상을 읊을 게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부끄럽고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무릎 사이에 이마를 대고서 온몸을 웅크렸다. 어둠이 내린 밤거리라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박유림.”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에 가슴이 내려앉는 건 왜인지. 허탈함과 민망함에 대답하지 못했다.

“박유림.”

날 부르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던 사람이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기억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

한줄기의 빛이 보였다.

“그렇지만 기억 안 나는 건 안 나더라도 책임질 건 책임져야지.”

“…….”

“덮쳤으니까 나 빨리 책임져.”

[프로필]

이채영(어둠속양초)

아직도 쓸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사람

이북 출간작: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전쟁 등

종이책 출간작: 스타일리스트 등

[목차]

<1> ~ <2>

<9 - 윤수 번외 1>

<10 - 윤수 번외 2>

<11> ~ <26>